2017년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한국 외교는 표류하고 있다. 한·미, 한·중, 한·일, 한·러 및 남북한 관계, 그 어느 것도 속 시원한 것이 없다. 북한의 핵·미사일과 생화학 무기 개발을 억지할 자체 능력이 없는 가운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할 주변 강국과의 관계마저 현 정부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엊그제 발표된 ‘한·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 보고서는 실험 외교의 결정판이다. 외교정책 결정에 있어 국민의 의견이 중요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여론을 빌미로 국가 간 합의를 무시하고 비공개로 약속한 문서를 일방적으로 공개한 것은 정상적인 외교 관행을 벗어난 것이다.
외교정책에 대한 여론의 역할 관련 연구로 유명한 올레 홀스티는 이러한 잘못된 여론 또는 잘못된 여론 파악의 문제를 잘 지적한 바 있다. 미국은 외교정책 결정에 있어 행정부와 의회가 대등한 위치에서 견제하며 균형된 시각을 유지해 왔다. 반면, 한국은 국회가 행정부에 종속돼 적절한 견제를 못해 여론이 행정부의 외교정책 결정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활용되거나 무시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번 보고서가 이목을 끄는 것은 양국 간 합의 뒤에 이면 합의가 있었고 그것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내용을 떠나 이면 합의의 존재 확인은 당시 양국 정부 입장에서는 떳떳하지 못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아울러 일본 총리의 공식 사과와 일본 정부 예산으로 출연된 위안부 재단 설립 등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지난 정부가 양보한 사실이 고스란히 알려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때 한·일 위안부 합의 무효화와 재협상 추진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지금 외교적 난관에 직면해 있다. 이면 합의와 더불어 문제 삼는 것은 합의 과정에서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견이 충분히 수렴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를 바로 잡으면서 일본과 새로운 합의를 이끌어내겠다는 게 문 정부의 생각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새로운 협상 테이블에 나서지 않을 경우 우리의 선택은 기존 합의안 파기 아니면 유지 둘뿐이다. 일본이 우리 요구대로 순순히 협상에 응할 가능성은 없다. 결국, 우리는 그들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기 위해 뭔가를 양보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우리가 얻는 것과 잃는 것을 잘 계산해 봐야 한다. 만약 그러한 손익 계산 없이 이번 사안을 외교 문제화했다면 이는 국익에 반하는 인기영합적인 민중주의 외교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문 대통령은 주변 4강은 물론 남북한 관계 개선에서 복안이 있다며 의욕적인 자세를 보여줬었다. 하지만 취임 이후 우리 외교는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는 우리 국력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도 있으나 상당 부분 현 정부가 자초(自招)한 것이다. 최근 문 정부의 외교적 행보를 보면 외교가 정치논리에 의해 휘둘린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문 정부가 직면한 외교적 어려움의 다수가 출범 후 시도한 실험 외교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한·일 위안부 합의 관련 양국 간 갈등도 과연 이 시점에서 이런 방식으로 접근해야 했는지 곰곰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 한국 외교가 전문 외교관이 아닌 소수 엘리트의 사고에 의해 좌우되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국익을 위한 외교와 국민이 선호하는 외교가 충돌할 때 지도자는 전자를 추구해야 한다. 국민 여론이란 가변적이며 그 자체 혹은 그 파악에 있어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실험 외교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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