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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핵무기보다 무서운 ‘탈탈탈’

바람아님 2018. 1. 18. 10:00
[중앙일보] 입력 2018.01.16 01:47

탈북자가 탈북자 탈탈 터는 유튜브 프로그램 보면서
체제 선전에 세뇌된 북한 주민 마음 얻는 것이
핵보다 무서운 무기임을 새삼 깨닫게 돼


배명복 칼럼니스트·대기자

배명복 칼럼니스트·대기자


‘탈탈탈’을 즐겨 보고 있다. ‘탈북자가 탈북자를 탈탈 터는’ 토크 프로그램이다. ‘배나TV’라는 유튜브 채널이 제작해 인터넷에 올리는 탈북자 관련 콘텐트 중 하나다. 탈북자 한 명을 앉혀 놓고 두 명의 진행자가 두 시간 동안 온갖 질문을 퍼붓는다. 진행자 중 최소 한 명도 탈북자다. 유튜브를 통해 우연히 시청하다 탈북자들의 솔직담백한 토크에 빠져 고정팬이 됐다.
 
프로그램은 탈북 동기와 과정을 다루는 1부와 한국 정착 생활을 다루는 2부로 나눠 진행된다. 각본도 없고, 편집도 없다. 셋이 모여 수다를 떨듯 자유롭게 진행된다. 생생한 리얼리티가 장점이다. 남한 사회에 대한 불만과 비판도 거침없이 쏟아낸다. 한국 시청자들 입맛에 맞춰 쇼 형식으로 진행되는 일부 종편 채널의 탈북자 프로그램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가족과 조국을 등진 ‘배신자’의 낙인을 감수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탈북하기까지 그들이 북한에서 겪었던 삶 하나하나가 소설이고 드라마다. 탈북 도중 붙잡혀 강제 북송될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과 라오스, 태국의 험준한 밀림과 거친 물살을 헤치고 자유 대한민국에 도착한 그들의 험난한 여정은 숭고하고 장엄한 인간 승리의 기록이다.
 
그들의 증언을 통해 새삼 확인한 것은 철저한 세뇌교육의 힘이다. “호시탐탐 침략 기회를 노리는 미제와 그 괴뢰 남조선으로부터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자주와 주체의 기치를 높이 들고 불철주야 애쓰시는 원수님과 장군님의 초인적 투쟁과 위민정신을 진실로 믿었다”는 것이 출연자들 대부분의 증언이다. 북한 땅을 벗어나 다른 세상을 보고 나서야 그것이 폭압적인 ‘김씨 왕조’를 유지하기 위한 조작된 도그마에 불과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북한 사회에 퍼진 한류 드라마의 힘도 확인했다. ‘탈탈탈’에 나온 탈북자 거의 대부분이 북한에 있는 동안 ‘남조선 드라마’를 접했다고 털어놓았다.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한 탈북자는 북한에서 본 한국 드라마들 제목을 줄줄 꿰며 강한 ‘중독성’을 인정했다. 구체적 탈북 동기야 사람마다 다르지만 드라마에서 본 한국 생활에 대한 동경이 알게 모르게 탈북 결심에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다.
 
배명복칼럼

배명복칼럼

 
평창 겨울올림픽을 앞두고 남북 간에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지난주 남북 고위급 회담에 이어 어제는 북한 예술단의 방한 공연을 위한 실무회담이 열렸다. 남북대화가 북·미 대화로 이어져 북핵 문제 해결의 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그런 기대는 솔직히 무리다. 왕조 체제를 지키기 위해 만든 ‘마법의 반지’를 왕 스스로 포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북한은 말끝마다 ‘우리 민족끼리’를 내세운다. 외세에 의존하는 사대주의적 자세에서 벗어나 우리 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좋은 말이지만 그처럼 모순된 말도 없다. 지금 외세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북한 자신이다. 핵과 미사일로 주변국은 물론이고 태평양 건너 미국까지 위협하면서 ‘외세 배격’을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 민족끼리’에 진심을 담으려면 핵무기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 다음 한반도 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외친다면 그건 말이 된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멀리 보고 북한 주민의 마음을 사는 쪽으로 가야 한다. ‘탈탈탈’을 보며 내린 결론이다. 핵과 무관하게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해야 한다. 한민족의 미래를 생각하는 우리의 진심이 북한 주민들 마음에 닿도록 해야 한다. ‘퍼주기’ 논란을 피하면서 북한 주민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북한 군인들에게 가는 쌀도 크게 보면 북한 주민을 위한 것이다.
 
적응 훈련 기관인 하나원에서 나온 탈북자들은 각기 배정된 11평 임대아파트에 들어서는 순간 환상이 깨지는 아픔과 함께 고단한 현실과 마주한다. 북한에서 잘살았던 일부 탈북자들은 ‘내가 이러려고 목숨 걸고 탈북했나’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탈북자는 자본주의 체제에 빠르게 적응해 열심히 산다. 가고 싶은 데 마음대로 가고, 하고 싶은 말 할 수 있는 자유의 소중함도 깨닫게 된다.
 
‘탈탈탈’에는 탈북자들의 진솔한 목소리가 들어 있다. 북한 주민들이 이 프로그램을 본다면 그 이전과 이후가 사뭇 달라질 것이다. ‘탈탈탈’처럼 탈북자가 만든 탈북자 콘텐트야말로 김정은에게는 핵보다 무서운 공포의 무기다. 그걸 본 북한 주민들이 점점 늘어난다면 김정은 스스로 핵을 내려놓는 코페르니쿠스적 결단을 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
 
배명복 칼럼니스트·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