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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올해의 '신스틸러'

바람아님 2018. 2. 14. 09:50

중앙일보 2018.02.13. 01:30

 

남의 잔치에 숟가락 얹어
자기 잔치로 만든 김정은
정상회담 제안은 '독이 든 사과'
한·미 연합훈련 참관 전제로
북이 핵·미사일 도발 유예하면
남북, 북·미 대화 선순환 가능
배명복 칼럼니스트·대기자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발군의 연기력이나 독특한 캐릭터로 주연 이상의 주목을 받은 조연을 ‘신스틸러(scene stealer)’라고 한다. 전 세계 국가 지도자들 가운데 ‘올해의 신스틸러’를 뽑는다면 더 기다릴 까닭이 없다. 2018년 수상자는 이미 결정됐다.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은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슬라이딩하듯 숟가락을 얹어 남의 잔치를 자기 잔치로 만드는 놀라운 기량을 보여 줬다.


‘신의 한 수’는 김여정이다. 김정은은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에 맞춰 자신의 여동생을 급파하는 ‘깜짝쇼’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김여정의 일거수일투족에 쏟아진 언론의 관심은 아이돌 스타들도 부러워할 만했다. 2박3일의 짧은 일정 동안 김여정은 대통령, 총리, 국정원장, 청와대 핵심 참모 등 남측 정부 요인들을 두루 접촉했다. 문재인 대통령과는 네 번이나 자리를 함께했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전속 안내원 역할을 자임했다. 북한이 평창올림픽을 ‘납치(hijack)’했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


핏줄이 능력에 우선하는 북한 ‘왕조’ 체제의 특성을 고려하면 정부가 국빈 이상의 파격 예우로 김여정을 환대한 것을 뭐라 할 수는 없다. 같은 ‘백두혈통’을 타고난 김여정만큼 김정은에게 말발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은 북한에 없다. 김여정은 특사 자격으로 김정은의 친서와 구두 메시지를 문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통일의 새 장을 여는 주역이 되셔서 후세에 길이 남을 자취를 세우시길 바란다”는 분수에 넘치는 덕담까지 했다. 김정은의 친동생이라는 위세가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김여정은 오빠 김정은과 스위스 베른에서 몇 년간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 만큼 바깥세상에 대해 모르진 않을 것이다. “서울이 처음이지만 낯설지가 않다”고 말한 걸 보면 한국 사정에 대해서도 알 만큼은 안다고 봐야 한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남한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솔직하게 김정은에게 전하는 것이 환대에 대한 보답이다. 이번 방문이 핵이나 미사일보다 더 중요한 게 뭔지 곰곰이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면 금상첨화다. 나름의 깨달음 끝에 “오빠,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우리도 뭔가 바꿔 봅시다”고 한다면 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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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전격적인 남북 정상회담 제의로 문 대통령은 살얼음판에 서게 됐다. 김정은이 내민 게 ‘독이 든 사과’란 걸 문 대통령도 알기에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켜 나가자”고 했을 것이다. 여건이 조성되지 않으면 못 만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미국을 의식했을 것이다.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은 남북 관계 진전에 대한 경계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남북한 선수들이 공동입장할 때 일어서 손뼉을 치는 기본적 에티켓조차 무시했다. 미국의 불신은 문 대통령이 넘어야 할 첫 번째 장애물이다.


미국의 입장은 단호하다.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 최대한의 압박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펜스 부통령은 문 대통령과의 대화 내용을 소개하면서 한국도 미국과 똑같은 입장이라고 못 박았다. 이런 터에 북한의 비핵화를 설득하기 위해서도 남북 대화는 필요하다는 논리가 미국에 설득력을 갖긴 어렵다. 핵 문제에 대한 북한의 명시적 태도 변화가 전제되지 않고선 북·미 대화는 물론이고 남북 관계 진전도 어렵다.


발등의 불은 평창올림픽 이후로 연기한 한·미 연합훈련 재개다. 올림픽 종료와 동시에 한·미가 연합훈련을 재개하고, 이에 맞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 도발을 재개한다면 한반도 정세는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올림픽 이전으로 회귀하게 된다. 다음달 중순 평창 겨울패럴림픽이 끝나기 전까지 무슨 수든 찾아야 한다. 한·미 연합훈련 참관을 조건으로 북한이 핵과 미사일 실험을 일정 기간 유예하는 것도 한 가지 방안이다. 이 중재안을 한국이 성사시킬 수만 있다면 남북 대화와 북·미 대화의 선순환도 기대할 수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국내 여론이 전 같지 않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비핵화 논의가 전제되지 않는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다. 그런 만큼 3차 정상회담을 열더라도 평양이 아닌 서울에서 열 필요가 있다. 서울이 어려우면 제주도도 좋을 것이다. 김여정처럼 김정은도 직접 남한을 보고 느낄 필요가 있다.


평창올림픽으로 조성된 남북 간 화해 분위기는 문재인 정부엔 천금 같은 기회다. 하지만 ‘양날의 칼’이다. 잘 쓰면 약이 되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양날의 칼을 다룰 만한 외교력을 갖고 있나. 국민의 기대와 우려가 여기에 있다.


배명복 칼럼니스트·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