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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알퍼의 한국 일기] 고국 영국에서 거꾸로 느낀 '문화 충격'

바람아님 2018. 1. 30. 11:13

(조선일보 2018.01.30 팀 알퍼 칼럼니스트)


영국 카페에서 샌드위치 먹은 뒤 팁 줘야 하는지 헷갈려 눈치 봐
12년 서울 생활에 영국도 낯설고 韓國人도 아닌 '어중간한 신세'
50년 전 미국 이민 떠난 한국인도 고국의 변화에 혼란스럽게 여길 듯


팀 알퍼 칼럼니스트해외에 다녀온 적이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문화 충격(cultural shock)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당장 한국을 벗어나 낯선 나라의 식당에서 물을 주문하면 대부분 웨이터가 커다란 생수병을 테이블로

가져와 계산서에 몇천원이 추가되게 만든다.

그렇다면 오랜만에 돌아간 고국에서 거꾸로 '역(逆)문화 충격'을 느끼지는 않을까?


지난해 가을 나는 모국인 영국에서 5주 정도 머물다 왔다.

내가 서울에 정착한 이후 고향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다.

영국에 있던 어느 날 나는 마트에서 식료품 쇼핑을 하다가 여성 화장품 코너를 지나치면서 문득 이곳에 진열된 상품들에는

걸그룹 멤버들 사진 대신 왜 평범하게 생긴 백인 여성 사진들을 잔뜩 붙여놨을까 궁금했다.

그러다 지금 이곳이 내가 사는 서울 은평구의 동네 마트가 아니고, 영국에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나는 한국에서 12년째 살고 있다. 영국을 떠나 한국에서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영국 문화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됐다.

처음 한국에 도착했을 때 영국이나 런던에 대해 어떤 질문을 받아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들의 유통 기한이 이미 지났기 때문이다.

내가 살던 당시에는 영국이 EU를 탈퇴하는 브렉시트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고, 2012년 런던올림픽은 먼 미래였다.

무자비한 테러도 일어나지 않았고, 경제도 그런대로 좋았다. 내 기억은 모두 12년 전 영국에 맞춰져 있었다.


이번 영국에 머물면서 가끔 나 자신이 관광객처럼 느껴진 적이 있다.

한때 우체국이었던 자리에 새롭게 들어선 트렌디한 카페에 들렀을 때였다. 맥주와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은 후

계산을 할 때가 되자 갑자기 혼동되기 시작했다. 서빙을 하는 직원들에게 팁을 줘야 하는 것인가 아닌가?


[팀 알퍼의 한국 일기] 고국 영국에서 거꾸로 느낀 '문화 충격'
/일러스트=이철원


영국에서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경우 대개 팁을 주지만, 맥주를 마시는 펍에선 팁이 필요 없다.
그러나 내가 주문한 곳은

카페였다. 내가 먹은 것은 음식이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식사는 아닌 샌드위치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테이블에 앉아서 슬금슬금 곁눈질로 다른 사람들이 계산을 할 때 팁을 주는지 안 주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왜 이런 애매모호한 상황이 일어난 걸까? 대부분의 한국 사람은 카페가 영국에 흔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런던 중심지를 제외한 대도시에 카페 문화가 퍼지기 시작한 것은 내가 영국을 떠난 2000년대 들어서다.

나와 달리 지난 12년을 영국에서 보냈던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될지를 정확히 알 것이다.


한 번 모국을 떠나서 다른 나라에 오래 거주하게 되면 모국과 자연스럽게 분리되기 시작한다.

고향에 다시 돌아가면 그 지역 사람처럼 보이고 그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겠지만, 나의 사고 체계는 더 이상 그들과 같지 않다.

한 번도 영국을 떠난 적이 없는 친구들의 생각에는 나는 더 이상 영국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한국 사람 또한 아니다.

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에 낀 사람이다.

참고로 음식을 좌석까지 가져다주는 '테이블 서비스'가 있는 곳에서는 카페라도 팁을 주는 편이 좋다.


나는 1960~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한국 사람들에게서 가끔씩 비슷한 예를 목격한다.

이민자들은 다시 한국 땅을 밟을 때 큰 혼란에 빠진다. 그들이 한국을 떠났을 때 서울 강남은 소가 풀을 뜯는 푸른 벌판이었고,

기차에 오른 낯선 사람들끼리 서로 정답게 대화를 나누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강남 땅덩어리가 맨해튼 아파트만큼

비싸고, 지하철에는 입을 꾹 다물고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져라 쏘아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후 나는 영국에서 또 다른 심리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국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은 "생큐"로 끝난다. 심지어 윗사람에게 업무 지시를 받아도 영국인들은 "생큐"라고 말한다.


그 말이 내 잠재의식 속에 남았던 모양이다. 한국에 돌아온 직후 동네 백반집에 밥을 먹으러 갔다.

주인아주머니가 반찬을 하나씩 가져다줄 때마다 나는 연신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내가 '감사합니다'를 수십 번쯤 말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 주인아주머니는 실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저 외국 놈은 아무래도 할 줄 아는 한국말이 '감사합니다'밖에 없는 모양이야"라고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