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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칼럼] 개헌을 다루는 민주적 방법

바람아님 2018. 3. 6. 08:13


중앙일보 2018.03.05. 01:26


특정 이념·집단의 이해와 요구들
개헌 논의에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건국·민주화운동·경제적 이념 등
새 헌법 전문에 넣는 것도 불필요
청와대 주도하는 개헌 그만둬야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
현재 개헌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대통령이 대선공약을 실행에 옮긴다고 생각하면서 개헌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헌법 전문부터 기본권, 정부 형태, 지방분권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개헌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제헌의회에서 헌법을 새로 만드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세 번째는 이와 같은 광폭의 개헌안을 6월 지자체 선거와 함께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할 때 그 준비 시간이 놀랍도록 짧다는 것이다. 이렇듯 거대하고 과감한 발상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진보파들이 촛불혁명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힘을 배경으로 진보의 열정과 신념을 구현코자 하는 청와대와 여당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민주적 가치와 이념을 강화하는 새로운 헌법을 쓰고자 시도하고 있다.


헌법은 특정 정부의 정책 비전과 프로그램, 특정 사회 세력의 가치와 이념을 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나라의 근본이 되는 법으로 정부를 조직하는 원리와 방법을 담는다. 모든 시민이 수용하고 실현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 권리와 같은 보편적 가치와 동시에 정치 경쟁의 기본 원칙과 절차를 포함한다. 헌법은 경쟁하고 갈등하는 모든 정치·사회 세력들이 정치 경쟁의 영역에서 배제되거나 불이익을 받음이 없이 선거 경쟁과 정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과 규칙을 제도화한다. 따라서 헌법이란 그 의미와 역할, 그리고 그것이 작동하고 지속하기 위한 조건에 있어서도 한 사회의 부분 이익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 일반 이익을 대표할 때 그 효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어떤 파당적 이익이나 특수 이익을 추구하며 편향성을 가지면 민주주의에서 헌법 개정이란 아예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정부가 대선공약을 이행하는 방식으로 개헌을 추진할 때 그것은 이미 현 정부의 관심사와 정치관, 민주주의에 대한 특정의 이해 방식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개헌 논의 과정은 곧바로 파당적이고 단기적인 이해관계, 그와 직결된 보수-진보 간의 이념 갈등과 접맥된다. 이렇게 되면 개헌 논의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이성적 토론과 서로 다른 가치와 관점 간의 합리적 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정치 공간은 처음부터 자리 잡기 어렵다.

최장집칼럼
촛불시위의 원인은 무엇인가, 정치가 잘못되어서인가, 헌법이 잘못되어서인가, 헌법이 문제라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이러한 중대 문제를 둘러싸고 진지한 논의가 이뤄지는 것을 필자는 본 적이 없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개헌에 대한 요구는 촛불시위와 더불어 형성되었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여론·의견·요구들이 정부 정책 방향에 반영되고, 개헌 의제와 내용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개헌 의제가 엄청나게 광범위한 것은 이러한 현상을 반영한다. 개헌안은 크고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기 전에 촛불시위를 통해 여러 부문에서 제기된 수많은 요구를 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개헌 논의는 정치와 사회 전체의 중대 문제를 다루기보다 특정 세력의 이익과 가치, 의견이 경쟁적으로 개헌 의제를 구성하고, 그러한 의제를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논의의 중심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현 정부가 진정으로 개헌하기를 바라고, 나아가 그 개헌이 좋은 내용으로 구성되기를 바란다면 이탈리아의 정치이론가 조반니 사르토리가 헌법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로 제시한 ‘실체적 내용에 대한 중립성’(content neutral)이라는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그의 말대로 헌법은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창출하는 방법을 확립하는 것이지 방향 그 자체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보수-진보 간 또는 경쟁하는 사회 세력 간 힘의 균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이념 갈등을 불러오거나 특수 이익이나 특정 집단의 요구를 반영하는 사안들이 헌법 개정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건국과 관련되거나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새롭게 헌법 전문에 포함시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경제 운영에서 특정의 사회경제적 이념이나 내용을 헌법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문재인 정부가 진정으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의미 있고 좋은 개헌을 하려 한다면, 지금이라도 청와대가 주도하는 개헌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 역할은 국회로 이관되어 여야 정당들이 의제를 선정하고 심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개헌 논의에서 가장 중심적이어야 할 정부 형태와 선거제도를 둘러싼 논의를 지금부터라도 시작하기를 바란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