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에버라드 칼럼
필자는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와 한국과의 대화 모색이 대북 제재로 인한 경제적 압박과 미국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또 북한이 한·미 연례 군사훈련 중단과 주한미군 철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남한을 최대한 압박할 것이고 그 시점이 개막식 전날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하지만 북한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평양에서의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최대 압박 시점을 정상회담으로 늦춘 것이다.
북한으로선 남북 정상회담의 성사가 진정 중요해졌다. 이를 위해 남한 정부와 국민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다. 많은 양보도 했다. 예를 들어 과거엔 남북 단일팀에 남북 선수가 동수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번엔 북한 선수가 소수인 걸 받아들였다. 처음으로 ‘김일성 일가’를 남한에 보내기도 했다. 북한 예술단과 응원단도 긍정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북한의 의도대로 되지 않고 있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초청 의사에 신중하게 대응했다.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의 방남 이후에도 여전히 확답을 주지 않고 있다. 한·미 연합훈련도 다음 달 초 계획대로 진행될 예정이다. 정상회담을 제안하면 남한 대통령이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온 북한으로선 당황스러울 게다. 이는 반대로 북한이 더 정상회담을 원하는 듯 보이게 했다. 북한은 남북 관계개선에 대한 한국민의 지지가 예전만 못하며 문 대통령이 자기 생각이 어떻든 조심스럽게 행보할 것이란 걸 알고 있다.
문 대통령은 더욱이 북한이 미국과도 대화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북한은 당초 미국과 연결되길 거부하는 듯했다. 하지만 김영철 부위원장이 평창에 도착했을 때 “한국과 미국과의 대화가 병행해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고 했다. 북한으로선 남한과의 관계 진전, 더 나아가 정상회담을 위해선 미국과의 대화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미국은 이런 북한을 더 어렵게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적절한 조건에서만 북한과 대화하겠다”고 했고 같은 날 백악관 대변인은 “북·미 대화의 조건은 북한의 비핵화 동의”라고 했다.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도 김정은이 “비핵화 대화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바꿔야 협상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미국에 대화의 문턱을 낮추라고 제안했지만, 미국은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할 게 분명하다. 북한의 핵 위협을 미국에 대한 가장 큰 협박으로 간주하고 이의 제거를 최우선 과제로 꼽는 트럼프 행정부 아닌가.
북한은 따라서 끔찍한 난제에 직면했다. 자신들이 바라마지 않는 남북 정상회담으로 가기 위해, 자신들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핵 포기를 겨냥한 대화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다. 미·북 대표단 사이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한반도 담당 보좌관 앨리슨 후커와 북한의 외무성 북미국 부국장 최강일 같은 이들이 있었음에도 접촉이 없었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북한은 아직 대화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무엇을 할지 정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최근엔 삼중의 타격도 입었다. 우선 지난달 23일 미 백악관이 발표한 새로운 대북 제재다. 석유·물품 등 수입을 위해 북한이 의존해온 다수의 상선이 포함됐다. 이는 북한 경제에 큰 타격일 뿐 아니라, 북한이 남한에 다가가도 미국이 입장을 누그러뜨리는 건 아니란 걸 보여주고 있다.
둘째, 중국 공산당이 국가주석 3연임을 금지한 헌법 조항을 폐지하려 한다는 점이다. 중국 정부는 국제정세의 불안정한 상황은 피하려 할 것이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반대파들에 공세 빌미를 줄 수 있어서다. 북한이 도발이라도 한다면 중국이 격노해 강하게 징계에 나설 수도 있다. 중국은 미국의 군사공격을 막기 위해서라도 대북 제재 이행에 진지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한다. 그게 미·중 관계를 개선하는 길이라고 여긴다.
마지막으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가 북한이 시리아에 화학무기 개발을 지원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는 아랍 세계에서 북한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중국도 북한을 감싸기 어렵게 했다.
현재로선 북한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트럼프 대통령이 조건 없는 대화를 받아들이도록 압력의 수위를 높이는 것이지만 성공할 것 같진 않다. 중국이 나서길 꺼릴 시기여서다. 만일 비핵화 의제를 포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국이 북·미 대화를 거부해 결국 남북 정상회담도 열리지 않게 된다면 남한과 북한이 모두 워싱턴을 비난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렇더라도 트럼프가 걱정이나 할지 모르겠다.
북한으로선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대규모 사이버 공격을 준비하고 있으며 북한 내부망에 침투할 계획이라는 신뢰할만한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미국 관계자로부터 미국이 타격에 준하는 군사옵션을 검토 중이란 말도 들었다. 예를 들어 미국 전투기가 북한 영공에 근접 비행하는 것이다. 북한으로선 비행기를 출격시키거나 대응을 안 하는 방법이 있을 게다. 전자라면 귀중한 연료를 소비하게 된다. 동시에 대공 방어의 약점을 드러낼 수도 있다. 미군의 F-16에 맞서 구식인 MIG-21을 출격시킬 테니 말이다. 후자도 위험한 선택이다. 근접 비행하는 미군 전투기가 정밀타격(surgical strike)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오래지 않아 평창올림픽이 긴장의 끝이 아닌, 일시 중단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게 될 듯해 필자의 마음이 무겁다.
전 평양 주재 영국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