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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의 사마귀, 영의정의 검버섯… 초상화에 담긴 비밀

바람아님 2018. 3. 29. 17:10

(조선일보 2018.03.29 유석재 기자)


피부과 전문의 이성낙 박사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 출간
519점 초상화로 피부병 진단


마맛자국까지 그대로 그려 "올곧은 선비 정신의 표현"


피부과 전문의 이성낙피부과 전문의 이성낙 /조인원 기자


"그렇지, 바로 이거야!"

1979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 출품된 추사 김정희의 초상 앞에서 희색을 감추지

못하는 40대 남성이 있었다. 피부과 전문의 이성낙(80·작은 사진) 박사였다.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림 속 추사의 뺨에서 천연두 흔적이 보였던 겁니다."


그로부터 40년 뒤, 가천대 명예총장인 그는 단행본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눌와)을 출간했다. 4년 전 자신의 명지대 미술사학과 박사 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 질환에 대해 쓴 책이다.

"모두 519점의 초상화를 조사했습니다. 보존 상태가 좋아 진단이 가능한 358점 중

75%인 268점에서 20종의 피부 병변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후천성멜라닌세포모반점(점) 113점, 노인성흑생점(검버섯) 85점,

지루각화증(돌출된 검버섯) 37점…. 73점에서 천연두 흉터, 9점에서 만성간질환의 결과인 흑색황달을 찾아냈다.


살아 있는 환자가 아니라 '옛 그림'을 가지고 피부병 임상 진단을 한 셈.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만큼 조선시대 초상화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정교하게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승정원일기'에 '털끝 하나 머리털 한 가닥이 조금이라도 차이가 나면 다른 사람(一毛一髮, 小惑差殊, 卽便是別人)'이라고

했던 원칙이 500년 넘게 이어졌던 것이다.

19세기 화가 이한철이 그린 추사 김정희 초상화..
19세기 화가 이한철이 그린 추사 김정희 초상화. 뺨(오른쪽 아래 확대 부분)에서 마맛자국이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이 총장이 초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64년 독일 뮌헨대 유학 때였다.

피부과학을 강의하던 알프레드 마르키오니니(1899~1965) 교수가 서양 미술품에 나타난 피부 병변에 대해 설명했다.

"예술을 저런 시각에서도 접근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무릎을 쳤습니다."

1975년 귀국 뒤 박물관과 종갓집, 해외 소장 기관을 샅샅이 훑으며 초상화를 연구했다.

처음엔 '별 이상한 의사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짓던 사람들도 점차 그의 이름이 알려지며 호의적으로 대해줬다.

미술사학자들의 권유로 2010년 일흔이 넘은 나이에 대학원에 진학해 7학기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에선 오른쪽 눈썹 위 이마에 작은 혹(모반세포성모반)이 보였다.

선조 때 문신 홍진의 초상화는 주먹만큼 부풀어 오른 코를 숨김없이 그렸다.

정조 때 문신 서명응의 눈 주위에선 몽골반점의 흔적이 역력했고,

같은 시기 문신 서직수의 얼굴에선 무척 드물게도 한 모공에서 털 세 개가 나온 군집모(群集毛)가 생생했다.

순조 때 무신 신홍주의 초상은 턱수염 속에 숨은 작은 혹까지도 세밀하게 묘사했다.

영조 때 문신 송창명의 초상화에 나타난 백반증(피부 일부가 희게 변하는 증상)은 독일 피부과학 학술지에 발표해

'세계 최초의 백반증 그림'임을 인정받았다.


"생각해 보세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걸 감독하는 사람, 모델이 된 사람이 모두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원칙에 동의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런 그림들이 나올 수가 없었겠지요." '그릴 게 없어서 내 이마에 있는 사마귀까지 그렸냐'며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다는 얘기다.


반면 과시욕이 강한 중국 초상화, 얼굴빛을 밝게 칠한 일본 초상화에서는 피부 질환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화풍이 일관되게 지속됐다는 것은 조선시대 선비정신의 실체가 무엇인지 보여준다"고 했다.

"그것은 올곧음과 정직함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가치이지요."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
(피부과 의사, 선비의 얼굴을 진단하다)
이성낙 저 | 눌와 | 2018년 03월 16일 | 2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