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作品속 LIFE

[Why] 마치 내 얘기 같은, 책 속 가득한 인생의 아이러니

바람아님 2018. 4. 15. 08:36

조선일보 2018.04.14. 03:03

 

[김현진의 순간 속으로]
웹툰, 웹 소설, 5분 남짓한 웹 드라마처럼 짧은 시간에 문화 콘텐츠를 즐기는 ‘스낵 컬처’ 전성시대다. ‘오 헨리’ 단편집은 시대를 앞서간 스낵 컬처. 과자 한 봉지, 차 한 잔처럼 가볍게 즐길 수 있지만 인생사 아이러니의 깊은 맛이 진하게 우러난다./픽사베이

십 년쯤 전 대학을 졸업하면 전공이었던 시나리오 작업에 매진할 생각이었는데 부모님께서 대형 사고를 쳐 버리고 말았다. 결국 정기적인 수입으로 부모님의 부채를 도와 드려야 했기 때문에 다니고 싶지 않은 회사에 억지로 매여 있게 됐다. 정시 퇴근하는 날은 시계가 다섯 시 반을 가리키면 나가서 술을 마시고 싶어서 손이 달달 떨려왔다. 이미 어른이니까 누구에게도 함부로 위로를 바랄 수 없어 500㏄잔 속에 둥둥 띄워 넣은 소주잔이 거품을 일으키는 걸 보며 이 강제 효도가 빨리 끝나길 바랐지만 기약 없는 일이었다. 자식이 되어 부모님을 도와 드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어디냐고 숱하게 자신을 위로했지만 꿈을 향해 나아가려다가 스타트 라인에서 자빠진 셈이 됐으니 마음에 화가 꽉꽉 들어찼다.


그렇게 차곡차곡 포개진 화를 위로해 준 것은 찌부러진 잔에 마시는 막걸리 한 병과 '오 헨리'의 소설들이었다. 지금 서울 성동구 옥수동은 재개발이 끝나 세련된 지역이 됐지만 그때 내가 살았던 옥수동은 아직 개발이 진행되지 않아 꼬불꼬불한 산동네였다. 그 꼬불꼬불한 골목들을 내려가면 40년 넘은 순댓국집이 있었다. 팔순이 넘은 할머니께서 새벽 다섯 시가 되면 가마솥에 불을 때고 순댓국을 팔팔 끓여내기 시작하는 곳이었다. 회사를 가지 않아도 되는 토요일이면 나는 오 헨리 전집을 끌어안고 비틀비틀 순댓국집으로 내려갔다. 교과서에도 실린 '마지막 잎새' 같은 작품들 때문에 흔히 오 헨리를 따뜻한 휴머니즘 작가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여러 작품을 읽어 보면 따뜻함 말고도 인생에 배신당한 사람 특유의 어떤 차가움 역시 느껴진다.


은행에서 일하다 횡령 혐의를 쓰고 나라 밖으로 멀리 도망쳤던 오 헨리는 어린 아내가 위독하다는 연락에 귀국하지만 아내의 임종은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 그 대신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감옥이었다. 그는 감옥에서 약사로 일하면서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때 쓰기 시작한 오 헨리라는 필명은 그가 지어낸 것인지 간수의 이름에서 딴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분명한 것은 그가 감옥 생활을 버텨내면서 과연 출판될지 알 수 없는 글을 한 글자 한 글자씩 써내려 갔다는 것이다. 아이러니를 다루는 데는 누구도 오 헨리를 따를 수 없다.


오늘은 독자 여러분께 '책 읽어주는 여자'가 되어 그 아이러니의 정수가 들어 있는 작품을 몇 가지 살펴보려 한다. '마지막 잎새' 외에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젊은 부부는 서로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 싶어하지만 둘 다 그럴 돈이 없어 자신의 소유물을 돈으로 바꾸어 선물을 사게 된다. 남편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근사한 회중시계를 팔아 아내의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에 꽂을 머리 장식품을 사지만, 아내는 남편의 회중시계에 달 멋진 시곗줄을 사기 위해 머리를 깎아 버린다. 이런 이야기까지는 아름답지만 다른 작품에서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그가 느끼는 연민 같은 것을 엿볼 수 있다.


어느 바쁜 사업가는 정신없이 돌아가는 증권시장에서 한참 활약하다가 갑자기 자신과 함께 일하는 여성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10분밖에 여유가 없다며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웬 반지를 끼고 있던 그녀는 깜짝 놀라 말한다. "여보, 우린 어제 결혼했어요. 당신이 청혼해서 모퉁이 교회에서 결혼했잖아요." 이 사업가는 너무 바쁜 나머지 어제 청혼한 사실도 잊은 것이다.


비누 공장을 운영해 큰 부자가 됐지만 졸부라고 경멸을 받는 노신사는 아들이 걱정이 많은 것 같아 이유를 묻는다. 아들은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그녀의 시간은 사교계라는 세계 속에서 모두 철저히 예약이 돼 있어 그녀와 마주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아버지!" 아들의 침통한 말에 아버지는 깜짝 놀라며 쏘아붙인다. "내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뭔지 백과사전을 본 다음 이제 부록을 볼 차례니 그런 말 하지 말아라." "저에게 기회는 며칠 후 그녀를 마차에 태워서 극장에 데려다주는 한 십 분뿐이에요, 그사이 무슨 말을 하겠어요?" 며칠 후 두 사람이 마차에 탔는데 사거리에서 길이 완전히 꽉 막혀 마차가 움직이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마차에 갇혀 있는 동안 이어진 청년의 구애에 처녀는 마음을 열고 두 사람은 약혼한다.


오 헨리는 여기서 짓궂게도 '이야기를 여기서 멈추어야 하겠지만 독자여, 진실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우물의 바닥이라도 파고 들어가야 한다'라고 쓴다. 잠시 후 사거리에서의 사고를 연출한 수완가가 노신사에게 잔금을 받으러 온다. 흔쾌히 돈을 내준 노신사는 갑자기 이렇게 묻는다. "자네, 혹시 그때 날개 달린 통통한 아기가 활과 화살을 들고 있는 걸 보았나?" 물론 큐피드를 말하는 것이다. 수완가는 대답한다. "못 봤지만 그런 녀석이 있었다면 제가 보기 전에 경찰에 잡혀갔을 겁니다."


아파트 위아래층에 사는 친한 친구 사이 두 여자는 친구지만 너무 다른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다. 위층 여자는 남편에게 주먹으로 얻어맞지만 그 싸움 후 얻은 달콤한 키스나 비단 스타킹 같은 선물을 늘 아래층 여자에게 자랑한다. 이것이야말로 스릴 넘치는 진정한 부부 생활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래층 여자의 남편은 늘 평범하게 저녁을 먹고 신문을 읽는 평화로운 생활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다. 아래층 여자의 눈에 위층 여자는 마치 인디언에게 납치당했다가 연인에게 구출받은 처녀처럼 격렬하고 로맨틱한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조용한 생활은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자신도 위층 여자 같은 생활을 하기 위해서 그녀는 분연히 일어난다. "내가 당신 빨래나 해주는 사람이에요?" 버럭버럭 소리를 지른 그녀는 확실히 얻어맞기 위해 남편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엉엉 우는 소리에 위층 여자가 내려와 그이가 때렸느냐고 묻자 아래층 여자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한다. "그이는 지금 빨래를 하고 있어요…."

이 몇 가지들도 물론 보석 같지만 오 헨리의 소설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바쁜 회사일이나 사업 등으로 지쳐서 책을 한 권 읽고 싶은데 뭘 보면 좋을까, 자기계발서 같은 건 읽기 싫고 인문학이나 장편 소설은 너무 부담스러운 분들에게 오 헨리의 소설을 꼭 권하고 싶다. 짧게 읽을 수 있는 글로 가득하면서도 인간이라는 우리 존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는 주제를 오 헨리보다 더 탁월하게 쓰는 작가를 나는 알지 못한다.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당연하다는 사실을 오 헨리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알려 준다. 짬짬이 읽을 수 있는 글이니 이 봄날, 꼭 읽으시기를.

       

김현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