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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할꺼나, 이 끝모를 증오를

바람아님 2018. 4. 9. 09:07

[중앙선데이] 입력 2018.04.07 02:00


“농민 죄수들은 거칠고 사악하고 분노로 가득 찬 인간들이야. 귀족에 대한 그들의 증오는 한계를 몰라. 기회만 주어졌다면 우리를 산 채로 잡아먹었을 거야.”  
 
도스토옙스키가 옴스크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 형에게 쓴 편지다. 뉘앙스는 두려움보다 놀라움에 가깝다. 페트라셉스키 단원을 비롯한 당대 거의 모든 반체제 지식인들의 요구 사항 1호는 농노 해방이었다. 그런데 정작 농노들은 자신들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다 잡혀온 투사들을 잡아먹을 듯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기가 탁 막혔다.  
 
증오는 유형지에서 그가 풀어야 할 가장 어려운 숙제였다. 농민 죄수들은 귀족 죄수들을 증오했고, 자기네끼리 증오했고, 정치범들은 그런 죄수들을 증오했다.   
 
다로보예 지도. 빨간 별표시가 마레이와 만난 곳

다로보예 지도. 빨간 별표시가 마레이와 만난 곳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지옥을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요약했다. 증오는 인간관계를 무너뜨리고 더 나아가 한 사회의 근본까지,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존속까지 흔들리게 할 수 있는 무서운 악이다. 그래서 칸트는 “증오는 항상 증오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 증오를 품은 채 소설을 쓰고 사상을 설파하는 것은 위선임을 자각했다. 러시아 사회가 증오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파국을 향한 질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자각했다.  
 
도스토옙스키를 향한 죄수들의 증오에는 이유가 없었다. 이제 비로소 그는 자신 같은 지식인과 농노들 간의 골은 무조건적이고 본능적이고 확고부동한 것임을 깨달았다. “비록 평생을 민중과 같이 일한다 하더라도, 혹은 은인이나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그들과  우호적으로 지낸다고 하더라도, 귀족은 근본적으로 결코 민중과 합치될 수 없다. 모든 것은 단지 시각적인 기만일 뿐이고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책이나 사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것을 확신했고 이 확신을 검증할 매우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결국 이것이 얼마나 옳은 지적인가를 뒷날에는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옳았다. 그가 이 글을 쓴 직후인 1861년 농노제 철폐가 공포되고 지식인들이 열망하던 개혁 정책이 줄줄이 도입되었지만, 러시아 사회에 분열의 늪은 갈수록 깊어져 갔다.  
 
농노 해방 외친 귀족들을 증오하는 농노들
도스토옙스키가 유배 전에는 진보였다가 후에는 보수로 전향했다는 식의 해석이 있는데, 훨씬 더 섬세한 고찰이 필요하다. 그가 공상적 사회주의 서클에 가입한 근원에는 고통과 부조리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 죄수들이 정치범을 향해 뿜어대는 적의 앞에서 그는 자신의 철학을 재점검해야했다. 현장에서 직접 체험한 단절의 망망대해는 착한 마음이나 이념의 다리로 좁힐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무서운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갭에 대한 치유 없이는 그 어떤 사회사상도 러시아를 개선시킬 수 없었다.  
 
그는 사회주의에 작별을 고했다. 아니, 공상적 사회주의의 바닥에 깔린 ‘형제애’의 본질은 간직하고 나머지는 버렸다. 추구하는 이상이 틀려서가 아니라 현실성이 없어서였다. 나중에 토틀레벤 장군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잘라 말했다. “저는 눈이 멀어 이론과 유토피아를 믿었습니다. 몽상에 대해, 이론에 대해 저는 유죄였습니다.”  
 
그러나 민중에 대한 환멸 뒤에 도스토옙스키가 돌아온 곳 역시 민중이었다. 그는 『죽음의 집의 기록』을 쓰고 나서도 뭔가 미진했던지 거의 20년이나 지난 뒤에 동일한 배경과 소재를 가지고 단편 『농부 마레이』(1876)를 썼다. 주인공은 도스토옙스키 자신임을 한눈에 알 수 있기 때문에 픽션이라기 보다는 에세이처럼 읽힌다. 짧고 단순하지만 증오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한 출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크다. 특히 집필 시점이 농노해방이 시행되고 15년이나 뒤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마레이를 만난 곳

마레이를 만난 곳

 
주인공은 현재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형을 살고 있는 지식인이다. 밀주를 마신 농부 죄수들의 술주정과 추잡한 노래와 드잡이를 보며 속으로 진절머리를 내고 있는데, 폴란드 출신 정치범 M의 혼잣말이 들려온다. “저놈의 강도들, 정말 싫다.”  
 
주인공은 막사 안 자기 자리에 누워 눈을 감는다. 부지불식간 몽롱한 상태가 되어 아홉 살 때의 기억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가족과 함께 다로보예 영지에서 여름을 보내던 중이었다. 어쩌다보니 혼자 떨어져 숲 속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늑대다!”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는 혼비백산해 멀리서 밭을 갈고 있는 농부한테로 달려갔다. 기골이 장대하고 덥수룩한 갈색 턱수염을 기른 쉰 살 가량의 농노로 이름은 마레이였다. “늑대가 와요!” 주인공은 숨을 헐떡이며 그에게 달려들어 소맷부리를 움켜잡았다. 하얗게 질려 바들바들 떠는 아이를 농노는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손톱에 새까맣게 흙이 낀 투박한 손으로 아이의 볼을 쓰다듬고는 아이에게 성호를 그어주었다. 먼발치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지켜봐 주는 농부 덕분에 아이는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면서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주인공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다가 20년이나 지나 유형지에서 이 일을 떠올린 것이다.  
 
“가엾은 농노의 그 어머니 같이 부드러운 미소가, 그리고 그가 성호를 긋던 모습이, 머리를 흔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빈 들판에서 이루어진 둘 만의 만남이었다. 오로지 신만이 이 일자무식 농노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깊고도 고상한 인간의 감정을, 그리고 섬세하고 여성스럽기까지 한 그 부드러운 마음을 저 높은 곳에서 보고 있었을 것이다.”  
 
회상의 힘 덕분에 주인공의 ‘다른 눈’이 번쩍 뜨였다. 막사 안의 농부 죄수들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짐승 같지만 동시에 무한히 불행한 인간이 보이기 시작하자 내면에서 기승을 부리던 증오가 수그러들었다. “머리를 깎이고 얼굴에 낙인이 찍힌 이 농부들, 술 냄새를 풍기면서 목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이 저주받은 농부들, 이들 역시 마레이와 똑같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저주 받은 농부들 역시 불쌍한 인간이었구나
그의 눈은 점차 동료 죄수들의 인간적 가치로 돌려졌다. “사람은 누구나, 설령 치욕 속에 놓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본능적으로든 아니면 무의식적으로든 자기의 인간적 가치에 대한 존중을 요구한다. 인간적인 대접은 이미 오래전에 신의 형상을 상실한  사람들조차도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러시아 민중이 가진 강인함, 예술적 재능, 마레이가 보여주었던 “깊고도 고상한 인간의 감정”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놀라운 개안의 순간이다. 소설은 극적 효과를 위해 순간적인 시각의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가 여기 도달하기까지에는 치열한 ‘시각 훈련’이 있었을 것이다. 가장 비천한 자들과 옷과 음식과 막사를 공유하면서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일말의 허영심을 다 버렸을 것이다.  
 
조각가 유리 이바노프의 작품

조각가 유리 이바노프의 작품

 
어느 날 노역에 나갔다가 동네 꼬마한테 동전을 적선 받은 것은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불쌍한 아저씨,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으세요!”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오랫동안 이 동전을 간직했다. 교만이 머리를 들 때마다 동전을 꼭 쥐었다. 실수로 동전을 잃어버렸을 때 보석을 분실한 듯 아쉬워했다.  
 
도스토옙스키가 죄수들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를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침묵 속에서 지옥을 응시하는 가운데 자신도 그 지옥의 일부임을 깨달았다. 그도 인정하듯 과거의 그를 바꿔놓은 것은 잔인한 운명이 아니었다. 무언가 다른 어떤 것이 시각과 신념과 감성을 바꿔놓았다. “공통의 불행 속에서 이상한 유대가 생겼다.” 인간 보편의 비극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그와 흉악범들 사이의 벽이 아주 높은 것은 아니었다.  
 
이때부터 그는 한결 자유로워졌다. 『농부 마레이』의 마지막을 읽어보자. “그날 저녁 나는 또 한 번 M을 만났다. 불행한 사람! 그에게는 나의 마레이와 같은 추억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나는 강도들이 싫다’라는 시선으로밖에는 이 농부들을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변함없는 증오의 시각으로 인간을 바라본 동료 정치범이 극도로 불행한 생활을 한 것과 달리, 도스토옙스키는 증오를 떨쳐버린 기쁨까지도 경험했다. “저는 거기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시작했어요. 저 자신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리스도를 이해하게 되었고 러시아인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제 자신이 러시아인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도스토옙스키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러시아 민중 예찬은 이렇게 그의 내면에 둥지를 틀었다.  
 
다로보예가 도스토옙스키에게 의미하는 두 가지 상반되는 의미, 곧 어린 시절의 행복과 아버지의 비극은 『농부 마레이』에서 화해했다. 부드럽고 강인한 농부의 이미지를 통해 외딴 시골 마을은 사랑과 증오를, 폭력과 추악함과 선량함을, 끝없는 수난과 끝없는 강인함을 다 끌어안는 러시아, 러시아인의 상징으로 재탄생했다. “그냥 부질없이 보낸 시간은 아니었어. 유배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민중의 유형과 성격을 알게 되었는지 몰라. 얼마나 놀라운 민족인가. 러시아 민중에 대해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야.” 통나무 집 기념관에서 나와 남쪽으로 걷다 보니 멀리 검은 대지와 울창한 숲이 보였다. 역사박물관이 제공하는 다로보예 지도는 이 지점을 “농부 마레이와 만난 곳”이라고 명시한다.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기억하는 것을 “같은 공간을 다시 여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극한 상황에서 어린 시절 뛰어 놀던 옹색한 시골 마을을 다시 여행했다. 덕분에 아무런 특징 없는 황량한 풍경은 의미로 충만한 공간이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러시아인’이 되어 있었다.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