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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완의 사이언스 카페] 눈썹 덕분에 진화한 인간

바람아님 2018. 4. 24. 09:41

(조선일보 2018.04.24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눈썹으로 연기했던 로저 무어… 인류 조상도 눈썹 덕분에 진화
두개골 평평해지면서 사회 발전, 눈썹 모양 보고 共感 능력 발달
주름 펴자고 표정 없애면 逆효과… 상대 감정 따라 하는 능력 떨어져


이영완 과학전문기자이영완 과학전문기자


영화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7번이나 했던 영국 배우 로저 무어가 지난해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눈썹을 추켜세우는 특유의 표정으로 바람둥이 스파이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구축했다.

무어도 생전 "내 연기의 범주는 왼쪽 눈썹을 추켜세우는 것과 오른쪽 눈썹을 추켜세우는 것 사이에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무어가 아니라도 누구나 눈썹으로 다양한 표정을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의심을 할 때는 한쪽 눈썹이 올라가고, 당혹스럽거나 놀랄 때는 두 눈썹이 모두 올라간다.

상대가 안쓰러울 때는 두 눈썹 모두 가운데 부분이 올라간다.

최근 이 눈썹 덕분에 인류가 진화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영국 요크대 연구진은 지난 9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 생태학과 진화'에 "먼 옛날 인류의 두개골에서 눈썹뼈가 사라지면서

멀리 떨어져 살던 인간 집단끼리 눈썹을 통한 의사 전달이 가능해졌다"고 밝혔다.


인간의 직계 조상은 호모 사피엔스이다. 4만년 전까지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 대륙으로 이주했다.

그보다 먼저 네안데르탈인이 정착해 있었지만 3만년 전 멸종했다.

과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도 호모 사피엔스처럼 도구를 만들고 벽화를 그릴 수 있었다고 본다.

지금까지 네안데르탈인이 살아있다면 행동에서는 구분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단, 모자를 푹 내려 쓴다는 조건에서다.

네안데르탈인은 눈썹뼈가 크게 튀어나와 한눈에 호모 사피엔스와 구분된다.


그렇다면 왜 호모 사피엔스에서 눈썹뼈가 사라졌을까.

지금까지는 눈썹뼈가 뇌를 담은 두개골과 얼굴뼈 사이의 빈 공간을 메우거나,

아니면 조악한 음식을 씹을 때 발생하는 충격을 막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다.

요크대 연구진은 교량이나 건물의 내구성을 알아보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기존 이론들을 검증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먼저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공동 조상으로 알려진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의 두개골을 스캔해 3D(입체) 컴퓨터

모델을 만들었다. 실험 결과, 눈썹뼈가 없어도 얼굴뼈와 두개골을 연결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또 음식을 씹을 때 발생하는 충격도 눈썹뼈가 있을 때 덜하기는 하지만 없어서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연구진은 대신 커뮤니케이션의 변화로 눈썹뼈의 실종을 설명했다.

수사슴의 거대한 뿔처럼 호모 사피엔스 이전 고(古)인류의 눈썹뼈는 상대를 압도하는 수단이었다.

실제로 미국의 한 인류학자가 가짜 눈썹뼈를 달고 거리에 나갔더니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했다고 한다.


반면 그 뒤의 호모 사피엔스는 마지막 빙하기라는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보다는 '협력'이 절실해졌다.

그러려면 표정만으로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눈썹뼈가 사라지자 호모 사피엔스의 얼굴에 눈썹으로 다양한 표정을 그려낼 일종의 캔버스가 생겼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특히 눈썹은 처음 만나는 집단 간의 교류에서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연구진은 추정했다.

근친교배는 열성 유전자를 낳는다. 이를 막으려면 다른 집단과 교류가 필요했다.

눈썹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어 처음 만난 사람들이 우호적인지 적대적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멀리서 아는 사람이 보이면 자연스럽게 눈썹이 올라가면서 친밀감을 나타낸다.


심지어 개도 인간을 따라 진화했다.

지난해 영국 포츠머스대 연구진은 실험을 통해 개는 사람이 쳐다보면 눈이 커지고 눈썹이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다른 개가 쳐다볼 때는 같은 행동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람이 그와 같은 행동을 진화시켰을 것으로 추정했다.

실제로 늑대가 인간에게 와서 개가 되면서 호모 사피엔스처럼 얼굴이 더 납작해졌다.

그만큼 눈썹을 움직이기 쉽다. 아마도 인간은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가진 개를 더 골랐을 것이다.


이 점에서 보툴리눔 독소는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보톡스라는 상표명으로 유명한 보툴리눔 독소는 근육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켜 주름을 없앤다.

하지만 2016년 이탈리아 과학자들은 보툴리눔 독소를 시술받으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발표했다.


사람은 타인의 표정을 보고 같은 감정 상태를 경험한다.

웃고 있는 아이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바로 공감(共感) 현상이다.

얼굴 근육이 마비되면 감정을 나타낼 눈썹도 움직이기 힘들어진다.

자연히 타인의 표정을 따라 하기 어려워지고 공감도 잘 일어나지 않는다.

과도한 주름 펴기는 진화를 거스르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