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8.03. 23:42
대통령이 모셔야 할 것은 '촛불 정신' 아닌 '헌법 정신'
문재인 정권은 과거 어느 정권과 가장 닮았을까. 물론 노무현 정권이다. 같은 피, 같은 DNA를 물려받았으니 당연한 결과다. 노무현 시절 솜털 뽀얗던 행정관들이 이마에 가로 주름살을 계급장처럼 붙이고 수석비서관으로 되돌아왔다. 무슨 위원장, 어느 기관 감사 자리가 빌 때마다 옛 얼굴들이 다시 피어나고 있다. 두 정권은 청와대 덩치도 닮았다. 올 1월 비서실 정원은 443명, 국가안보실(NSC) 정원이 43명이다. 최근 비서관 자리를 더 늘렸으니 500명에 육박할 것이다. 역대 최대 규모는 노무현 정권 마지막 해 553명이었다. 한국보다 인구가 7배, 경제 규모가 12배인 트럼프 백악관 비서실 2017년 정원이 377명이다.
놀라지 말자. 정치학자 박상훈씨의 최신 저서 '청와대 정부'에 따르면 정치 행태, 정치 스타일에서 문재인 정권과 가장 닮은 정권은 노무현 정권이 아니라 박근혜 정권이다. 문 정권의 대표 정치 상품은 적폐 청산이다. 어제는 검찰이 외교부 청사를 압수 수색했다. 외교문서에는 상대국과의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은밀히 나눈 이야기가 담겨있다. 한국과는 비밀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정설(定說)로 굳어지면 한국 외교는 벽에 부딪힐 게 뻔하다. 현 정권의 적폐 청산 집념은 이런 위험도 불사한다.
문재인 정권의 대표 상품인 적폐 청산이란 용어를 발명하고 거기에 정치 옷을 입혀 처음으로 정치 무기로 활용한 정치인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한국 언론 재단 기사 검색 프로그램을 통해 보면 1950년부터 40년 동안 '적폐'라는 단어가 들어간 기사는 10건에 불과했다. 국회 발언 속기록에도 1987년 민주화 이전 40년 동안 '적폐'라는 단어가 들어간 국회의원 발언은 총 15회에 지나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2014년 세월호 사건이 나자 그 원인으로 '적폐'를 지목하고 '적폐 청산'을 국정 목표의 하나로 내걸었다. 그러고 한 달 만에 국회와 언론에는 1000건이 넘는 발언과 기사가 넘쳐났다. 문재인 정권은 적폐 청산 용어 사용 저작권료를 박 전 대통령에게 지불해야 할 처지다.
지금 대한민국은 온 나라가 뱀이 몸을 둥글게 감아 제 꼬리를 잘라 먹듯 적폐 청산에 여념이 없다. 과거 정권에서 적극적으로 일했던 공무원은 직권남용으로 몰리고, 그게 두려워 발을 뺐던 사람들은 직무유기라는 덫에 걸렸다. 감사원 감사를 받고 검찰에 불려가고 법정에 선 공무원들 대부분의 '겉 죄목(罪目)'은 여러 가지지만 '속 죄목'은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둘 중 하나다. 지금 무사한 공무원이라 해서 다음 정권에서도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다.
4대강 사업 관련 공무원들은 세 정권을 거치면서 네 차례 감사원 감사를 받았다. 감사 결과는 정권 따라 달라졌다. 현재 원전(原電) 정책을 만지는 공무원들이 다음 정권에선 4대강 관련 공무원 처지가 될지 모른다. 대학 입시 정책에서 에너지 정책까지 정부가 결정해야 할 국가 기본 정책을 급조(急造)한 각종 위원회에 떠넘기는 사태를 예사로 봐선 안 된다. '책임 정부'는 사라지고 '위원회 정부'가 곳곳에서 속속 등장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이 '직접 민주주의'를 들먹이며 여당·야당·국회를 건너뛰어 국민과 직접 대화하겠다는 것도 박근혜 정권을 닮았다. 박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적폐 국회 청산 '국민 서명 운동'을 연상시킨다. 한국 정치에서 정치학 사전에 없는 '간접 민주 정치'라는 용어로 '대의(代議) 정치' '정당 정치'를 규탄했던 첫 사례가 1975년 유신헌법 국민투표 때였다. 박사모 극성에 국민들이 고개를 저으면서 박근혜 정권의 황혼이 시작됐다. 지금 '문빠'들 행태는 그때 박사모 이상이다. 다들 지긋지긋해 한다.
문재인 정권의 청와대 비서실 확대 명분은 '일하는 청와대'다. 그것도 박근혜 정권의 재판(再版)이다. 국민들은 박근혜 정권의 비서실장·수석비서관 이름은 기억해도 장관이 누구였는지는 모른다. '설치는 청와대'가 '노는 내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라의 공기(空氣)를 바꿔야 한다. 옛날 중국 어느 명장(名將)은 벌판에 널린 전사자(戰死者)들 한 사람 한사람의 등과 가슴을 살폈다고 한다. 진격하던 병사인가 도망치던 병사인가를 가려 상훈(賞勳)을 달리하기 위해서다. 언제까지 촛불 혁명, 촛불 정신 하며 촛불의 명령만 받을 것인가. 대통령이 받들어야 할 것은 헌법 정신뿐이다. 국민은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 더 늦기 전에 창문을 활짝 열고 나라 공기를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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