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연국칼럼] 누가 화살을 쏘았나
세계일보 2018.08.16. 23:39
상전벽해(桑田碧海)! 중국 혁신의 메카 선전(深?)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홍콩과 맞닿은 선전은 1980년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에 따라 중국에서 제일 먼저 경제특구로 지정됐다. 선전의 38년은 그야말로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는 기적의 시간이었다.
선전뿐이 아니다. 이런 천지개벽은 중국 곳곳에서 현재진행형이다. 한때 우리에게서 한강의 기적을 배웠던 ‘짝퉁의 나라’가 한국이 주춤하는 사이 추월을 시작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중국이 문호를 개방한 80년대 이후 소중한 민주화의 결실을 이루었다. 그러나 의문이 남는다. 민주화가 꼭 산업화의 희생을 통해서만 이뤄져야 했을까? 둘이 어깨를 겯고 동행하는 길은 없었는가?
요즘 우리 사회의 적폐 청산을 지켜보면서 세계 변화에 고민하기보다는 우리끼리 드잡이하느라 에너지를 탕진한다는 걱정이 앞선다. 공정거래위원장은 정부 회의에 지각하자 “재벌들 혼내주고 오느라 늦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대기업은 재벌이고 재벌은 적폐라는 인식이 집권층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그 과정에서 멍드는 것이 국가 경제다. 외환위기 이후 상황과 비슷하다는 진단이 해외에서 나오는 판이다. 쇠뿔을 바로 잡으려다 소를 죽이는 꼴이다.
대기업의 병폐를 시정하는 일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기업이든 사람이든 병은 고쳐야 한다. 유의할 점은 환부를 수술한답시고 환자의 생명을 되레 위태롭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기업 수술도 마찬가지다. 기업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썩은 부위를 도려내 건강을 회복시키는 것이 수술의 요체다. 여기에 어울리는 비유가 부처의 독화살 예화이다.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다면 빨리 화살을 뽑아야 한다. ‘화살을 누가 쏘았나, 화살의 깃이 무슨 새의 털로 만들었나, 그 활의 재료가 뽕나무인가’ 하는 문제는 독화살을 뺀 이후에 처리할 사안이다. 만약 이런 일로 시간을 끈다면 그 사람은 온몸에 독이 번져 필시 죽고 말 것이다.”
재벌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는 부처의 가르침과는 거꾸로다. 지난주 삼성의 투자 발표를 놓고도 청와대에서 ‘구걸’ 논란이 불거졌다. 그 무렵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주요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을 골프클럽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다. 트럼프는 그 자리에서 “3분기 경제 성장률이 연 5%대일 수 있다”고 말했다. 2%대 성장에 멈춘 한국과 대비되는 풍속도가 아닌가.
한국의 집권층은 최악의 ‘세습 적폐’ 김정은을 만나려고 평양으로 달려가면서도 대기업 총수와의 접촉엔 몸을 사린다. 경제 수장 김동연 부총리가 삼성 수장을 만나기까지 꼬박 1년이 넘게 걸렸다. 그것도 대통령이 먼저 금줄을 걷어낸 뒤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작년 이맘때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은 취임 1주일 만에 한국노총으로 달려갔다. 당시 그의 일성은 “정말 친정에 온 느낌”이었다.
대기업을 적폐로 몰면 투자와 생산 활동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기업은 소득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국부의 원천이다. 정부의 역할은 기업이란 나무가 소득과 일자리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도록 물을 주고 벌레를 제거하는 일이다. 기업과 싸우는 짓은 나무를 베면서 그 열매를 수확하려는 것이나 진배없다.
대한민국은 거친 뽕밭을 푸른 바다로 바꾼 나라였다. 그런 기적의 나라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화살을 쏜 범인을 색출하느라 온몸에 독이 퍼지는 줄도 모른다. 스스로 국가 재앙을 재촉하고 있다.
배연국 논설실장
[박정훈 칼럼] 베이징 서민 식당에서 文 대통령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혼밥' 한 대통령 마음이 편하진 않았을 것이다
약한 나라가 받는 수모에 대통령이 위기를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면 아직 희망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꺼내 든 규제 혁신 드라이브가 진심일 것이라고 믿는다. 다른 걸 떠나 그의 개인 체험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말 중국 방문 때다. 세계 첨단을 달리는 중국의 핀테크 산업 현장을 문 대통령이 생생하게 목격했다. 거지도 스마트폰으로 동냥한다는 중국이다, 문 대통령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그는 지난주 인터넷 금융 규제 점검 행사에서 이때 경험담을 꺼냈다. "아주 놀랐다"는 표현까지 썼다.
문 대통령을 놀라게 한 현장은 베이징의 서민 식당이었다. 방중 둘째 날, 문 대통령 내외는 이곳을 찾아 중국인 틈에서 식사를 했다. 청와대는 '서민 행보'로 포장했지만 사실은 공식 일정이 없어 '혼밥' 한 것이었다. 계산은 대사관 직원이 했다. 테이블 위 바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찍어 앉은 자리에서 68위안을 결제했다. 문 대통령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걸로 다 되냐"고 묻는 사진이 각 신문에 실렸다.
당시 문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수모론'에 휘말려 있었다. 3박4일 일정 중 중국 지도부와 식사는 두 차례뿐이었다. 여섯 끼를 우리끼리 '혼밥'으로 해결했다. 수행기자가 폭행당하고, 중국 외교부장이 문 대통령 어깨를 툭 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혼밥 하는 대통령 마음이 결코 편하진 않았을 것이다. 약한 나라의 무력감을 속으로 삼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됐다. 중국 측 홀대 덕에 문 대통령이 중국의 혁신 현장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국의 실체에 번쩍 정신 드는 계기도 됐다.
대기업 싱가포르 지사장을 지낸 전직 기업인 C씨가 블로그에 경험담을 올렸다. "중국 기업인 90여명 앞에서 강연을 했다. 강단에 올라 인사를 했는데도 전화하는 사람, 사진 찍는 사람들로 분위기가 산만했다." 어찌어찌 추슬러 강연을 마쳤더니 이번엔 '힐난조' 질문이 쏟아졌다고 한다. "삼성전자는 이제 초일류 기업이 아니다. 한국에선 왜 우버(차량공유서비스)를 못 하나, 정부와 기업이 왜 싸우나…."
C씨는 2~3년 전만 해도 달랐다고 했다. "그때는 한국 기업의 경영 전략이나 국가 정책을 하나라도 더 들으려고 안달이었다. '한국을 존경한다'고까지 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완전히 우리를 깔보는 분위기였다. 한국을 저 아래 있는 2류 국가 정도로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중국은 더 이상 한국에서 배울 것이 없으며 경쟁 상대도 아니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썼다. 지금 중국이 우리를 대하는 시선이 대체로 그럴 것이다.
우리는 '오만한 중국'을 일상적으로 체감하고 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중국 관광객들 목소리가 커지고 행동이 무례해졌다. 중국의 횡포를 전하는 뉴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진다. 중국 군용기는 우리 방공식별구역(KADIZ)을 수시로 넘나들고 있다. 어선 불법 조업을 단속하자 중국 외교부가 '문명적 법 집행' 운운하는 적반하장도 있었다. 사드 때 막무가내 보복은 기가 찰 정도였다. 사드의 소유자인 미국이나, 더 강력한 레이더를 운용하는 일본엔 한마디 못했다. 만만한 우리만 쥐어팼다.
중국은 DNA에 패권 본능이 새겨진 나라다. 그런데 상대가 약할수록 더 거칠어진다.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한국은 중국의 속국(屬國)이었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발언은 사실일 것이다. 중국이 '현대판 조공(朝貢) 체제'를 꿈꾼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다. 중국의 힘이 커질수록 우리에게 가해지는 압박은 커질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버티는 것은 한·미 동맹과 산업 기술력 덕분이다. 중국은 우리와 동맹으로 묶인 미국의 존재를 겁낸다. 한국이 우위를 점한 제조업 경쟁력도 두려워한다. 한국산 핵심 부품 없이는 중국 공장이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만 확실하게 지켜내면 중국도 함부로는 못한다. 뒤집어 말하면 두 가지가 흔들리면 중국에 휘둘린다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상황은 나쁜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한·미 동맹은 예전 같지 않다. 트럼프는 동맹에도 상업적 계산법을 들이대고 있다. 산업 경쟁력은 퇴조 기미가 역력하다. 주력 산업들이 속속 중국에 따라잡히고 있다. 인공지능 같은 미래산업은 중국에 뒤진 지 오래다. '반도체 굴기(崛起)'마저 성공하면 중국은 무서울 게 없어진다. 이러다가 우리가 중국인에게 발 마사지 해주는 날이 온다는 말이 나온다. 100% 농담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베이징 식당에서 문 대통령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4차 산업혁명에서 뒤처진 현실을 목격하고 위기감을 느꼈을까. 산업 기술마저 뒤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았을까. 힘 약한 나라가 받는 수모를 곱씹으며 문 대통령이 이를 악물었다면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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