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8.17. 03:15
한국의 對北 제재 의지도 不信.. 의혹 덮으면 韓·美 신뢰 금갈 뿐
지난 5월 국내 A은행 관계자들이 미 금융·사정 당국의 호출을 받고 비밀리에 미국에 다녀왔다고 한다. 미국의 대(對)이란 제재법 위반 혐의와 관련한 미국 측의 질의에 답을 하기 위해서였다. 오바마 행정부 때인 2012년 이 은행에 개설된 이란중앙은행의 원화 결제 계좌에서 위장 거래로 거액이 빠져나간 정황이 발견됐다. 그 얼마 후 시작된 미측의 조사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큰 혐의는 벗었지만, 미국 측은 미심쩍은 부분을 파고 또 파며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행정부가 바뀌었는데도 마찬가지다. 그때마다 은행은 법률 자문을 해가며 행여나 문제가 커지지 않도록 미측에 해명하고 있다.
A은행의 사례는 미국이 제재 위반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고, 얼마나 집요하게 추적하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불량 국가에 대한 경제 제재 시스템을 고안하고 주도해온 미국은 '작은 구멍'에 대해서도 가차 없다. 이를 적당히 넘기면 눈앞의 이익에 혹한 기업들이 한순간에 제재 대오를 무너뜨릴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조사가 철저한 만큼 응징도 가혹하다. 미국법은 제재 위반이 확정된 업체에 대해 처벌 조치 9개 중 3개 이상을 '의무적으로' 부과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 관할권 내 외환 거래 금지 ▲은행 신용거래 및 지불 금지 ▲자산 거래 금지 ▲미국으로의 수입 금지 등이 포함된 조치는 사실상 '달러 시스템에서의 축출'을 의미한다. 기업에는 사망 선고다. '정치적 고려' 등을 이유로 처벌을 면제할 수 있는 재량권도 최대한 제한한다. 실제로 지난 6월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 통신장비업체 ZTE사에 대한 제재 해제 방침을 시사하자, 미 의회가 법안을 통해 제동을 걸었다.
북한 석탄의 국내 반입과 의혹이 불거진 이후 많은 전문가가 우려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건은 우리 5·24 조치뿐 아니라 유엔 안보리 제재 및 미국 독자 제재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다. 그럼에도 우리 당국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여론이 악화되자 서둘러 '일부 영세 수입업체의 일탈'로 규정한 조사 결과를 내놓고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고 했다.
하지만 제재 전문가들은 "어림없는 소리"라고 말한다. 조사 결과 발표 후에도 남은 무수한 의혹에 대해 미국의 자체 조사가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국내 기업에 제재 관련 자문을 받는 한 변호사는 "미국 입장에서 볼 때 의심 업체의 관할 정부는 '검사'가 아니라 '변호사'일 뿐"이라고 했다. 관할 정부는 의혹을 제대로 파헤치기보다는, 경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적당한 선에서 덮으려고 할 가능성이 있다는 인식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는 얘기다.
우리 기업들이 미국의 제재 대상이 되느냐와 별개로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 내에서 한국에 대한 의혹의 눈초리가 확산되고 있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안 그래도 미국 싱크탱크 인사들은 "한국은 북핵 위협의 최대 당사자로서 비핵화를 위한 제재에 가장 앞장서야 하는데, 그런 의지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한다. "의무는 이행 않고 남북 공동 연락사무소 개설, 이란산 원유 수입 등과 관련해 '예외를 인정해달라'는 요구만 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이런 불신(不信)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석탄 문제는 정부가 선제적으로 빈틈없이 진상 규명을 하고 강력한 재발 방지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왜 한국 언론만 난리냐"는 식으로 넘길 일이 아니다. 한·미 간 신뢰에 금이 가면 문재인 정부가 바라는 남북 관계 진전도 속도를 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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