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12.22 어수웅·주말뉴스부장)
[魚友야담]
어수웅·주말뉴스부장
그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대성당'을 다시 읽는다고.
리스본 성당을 볼펜 하나로 함께 그리는 두 남자. 멀리 시애틀에서 찾아온
아내의 맹인(盲人) 친구와 처음에는 그를 무척 불편해하던 남편이 주인공이죠.
주름 편 종이 쇼핑백을 도화지 삼아, 자신의 손 위에 타인의 손을 얹은 기묘한 형태로
그린 첨탑과 창문. 처음에는 눈을 뜨고 시작했지만,
마지막에는 둘 다 눈을 감고 완성하는 두 남자의 대성당.
얼마 전 일산에서 또래 소설가 몇 명과 송년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 자리의 화제로 나온 단어 중에 '당사자성'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은 당사자(當事者)를 어떤 일이나 사건에 직접 관계한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2018년의 대한민국에서는 정치적 함의로까지 확장된 개념이죠.
하지만 이날 밤의 맥락은 조금 달랐습니다. 압축하면, 작가의 어떤 윤리적 태도에 관한 것이었죠.
독자가 작품을 읽었을 때 관련 당사자들이 불편함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 폐지를 줍는 할머니도,
자동화 시스템에 직장을 잃는 아파트 경비 할아버지도, 호떡을 파는 소년도, 노인의 성을 매매하는 박카스 아줌마도,
그리고 성소수자도… 물론 그 작품 속에 이런 인물들이 등장할 경우입니다.
요즘 대학에서 젊은 후배들에게 문학을 가르칠 때, 교수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개념이라고도 하더군요.
작가가 지녀야 할 윤리적 태도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지만, 조금 다른 고민도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완벽한 공감이란 과연 가능할까. 자칫 건방진 환상은 아닐까.
그리스 신화 속 이카로스는 연약한 밀랍 날개로 태양에 닿으려는 노력을 계속합니다. 불가능하죠.
정상 직전에 굴러떨어지면서도 끝없이 바위를 꼭대기로 밀어올리는 시시포스는 또 어떻습니까.
공감할 수 없다는 한계를 절실히 깨닫는 순간, 작가는 바로 그 지점부터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닐까요.
'대성당'은 볼 수 있는 남자와 볼 수 없는 남자가 손으로 만납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건, 마치 물리적인 감각뿐이라는 듯.
'아무튼, 주말'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전국 8도의 '얼굴 없는 천사'와 '키다리 아저씨'를 찾았습니다.
부디, 모두에게 복된 성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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