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전시·공연

자존심으로 지킨 문화재.. 간송 '대한콜랙숀'

바람아님 2019. 1. 5. 09:33
한국일보 2019.01.04. 18:31
3·1 운동 100주년 간송 특별전 '대한콜랙숀'의 3일 기자간담회에서 공개된 국보 제294호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달항아리처럼 둥그런 유백색 병에 세 가지 색깔로 국화와 곤충을 채색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하다. 연합뉴스

일제강점기인 1936년 11월 경성미술구락부 고미술품 경매장. 골동품 수집가들의 눈이 물건 하나에 꽂혔다. 조선 명품 백자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조선 백자의 백미로 꼽히는 작품으로, 현재 국보 294호다. 일본 거상이 “9,000원”을 불렀다. 1만원이면 경성의 멀끔한 기와집 다섯 채를 살 수 있는 시절이었다. 조선 도자기는 2,000원보다 비싸게 팔린 적이 없기도 했다. 젊은 조선인이 큰 목소리로 “1만원”을 불렀다. 경매장이 얼어붙었다. 둘의 경합이 시작됐다. 승자는 조선인. 1만 4,580원에 백자를 손에 넣었다. 그가 바로 고미술품 대수장가이자 보성중고등학교 동성학원 설집자인 간송 전형필(1906~1962)이다.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을 비롯해, 간송이 지키고 보존한 유물들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 ‘대한콜랙숀’에서 확인 수 있다. 국보 6점과 보물 8점 등 총 60여점이 나왔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주최한 전시다. 전시의 주인공은 유물보단 이야기다. 간송이 재산을 허물어 문화재를 수집, 일본 유출을 막은 사연들이 펼쳐진다.

일본 와세다대 3학년 때 10만석지기 상속권자가 된 간송 전형필은 1930년부터 문화재 수집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불과 23세 때였다. 간송미술관 제공

국보 68호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고려 상감 청자 기술의 정점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당당하게 벌어진 어깨에서 굽까지 내려오는 곡선이 아름다운 고려식 매병으로, ‘천학매병’으로 불린다. 1935년 일본 골동품사가 내놓은 물건을 조선총독부가 탐냈지만, 호가가 너무 높아 군침만 흘렸다. 간송이 나섰다. 단 한번의 흥정도 하지 않고 2만원이라는 거금을 치르고 구입했다. 4만원에 되팔라는 일본인이 나타났다. 간송은 “이보다 더 뛰어난 청자를 가지고 온다면 구입한 2만원에 그대로 넘기겠다”며 물리쳤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박물관에서 열리는 3•1 운동 100주년 간송 특별전 '대한콜랙숀'의 3일 기자간담회에서 관람객들이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1937년 간송은 일본으로 날아갔다. 영국 변호사이자 수집가인 존 개스비가 컬렉션을 처분하고 일본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다. 간송은 충남 공주 일대의 땅 1만 마지기를 팔아 도자기 20점을 샀다. 한 마지기가 100~200평 정도이니, 100만~200만평짜리 땅값을 치른 셈이다. 20점 중 4점은 국보로, 5점은 보물로 지정됐다.


겸재 정선(1676~1759)의 화첩인 ‘해악전신’이 땔감이 될 뻔 했다는 사연은 서늘하다. 1933년 조선인 수집가가 친일파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변소에 가다가 화첩을 발견했다. 불쏘시개로 쓰려고 아궁이 옆에 쌓아 둔 책 무더기 사이에 화첩이 있었다. 수집가가 구해 낸 화첩을 간송이 구입했다. 국보 270호인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추사 김정희의 글씨 등 간송이 경매에서 ‘전쟁 치르듯’ 낙찰 받은 유물들도 볼 수 있다. 한만호 간송미술문화재단 실장은 “3·1운동을 목격한 간송에게 일제시대는 암울한 시간이었을 것”이라며 “간송의 사명이 담긴 작품들은 문화재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말했다. 전시는 3월 31일까지다.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