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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칼럼 The Column] '국민 정서'라는 도깨비 방망이

바람아님 2019. 1. 26. 12:34

(조선일보 2019.01.26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善 지키고 惡 척결한다'는 명분 아래 16~17세기 유럽, 수만명 재판 넘겨 死刑시켜
관용 사라지고 증오 가득한 한국 정치권도 獨善에 취해 처벌·징계 일삼고 있지 않나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근대 초 유럽에서 자행되었던 마녀사냥은 실로 이해하기 힘든 기이한 현상이다.

밤에 짐승으로 변신한 여성이 사바스(Sabbath·마녀들의 집회)에 날아가서 악마와 성관계를 맺고,

그렇게 하여 얻은 가공할 힘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폭풍우를 일으킨다는 죄목으로 수만 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옛날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얼토당토않은 혐의로 법원에 정식 기소하여

처형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흔히 마녀사냥을 두고 중세에 민중들이 흥분 상태에서 마구잡이로 폭력을 행사한 광기(狂氣) 어린 행태가 아니었을까

추론하곤 한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마녀사냥은 16~17세기에 정점을 맞은 근대적 현상이다.

당시 유럽은 '미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과학혁명이 시작되고 계몽주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한 이성(理性)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구잡이로 사람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교회와 지방 정부가 중심이 돼 정식으로 기소하고

엄정한 재판을 통해 합법적으로 사형에 처했다. 종교인들과 재판관들은 지극한 선(善)을 수호하기 위해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지극한 악(惡)을 척결한다는 숭고한 의지로 가득했다.


또 한 가지 흔한 오해는 마녀사냥이란, 사악한 권력 기관이 공동체 내의 무고한 민중들을 무차별 공격했으리라는 믿음이다.

과연 그랬을까? 우리는 공동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순수하고 정겨운 곳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사람 사는 곳에서는 늘 증오와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마녀재판 역시 발단은 이웃 간 고발이다. 희생자를 기소하고

고문하고 유죄 판결을 내려 처형한 것은 권력 기관이지만, 그런 일을 발생시킨 동력은 민중층에서 나왔다.

'마녀사냥은 이웃이 이웃을 죽인 일'이라는 충격적인 연구 결과는 이 세상의 어두운 내면을 날카롭게 폭로한 혜안(慧眼)을

보여준다.


유의할 점은 모든 곳에서 다 비슷한 정도로 폭력 사태가 벌어진 게 아니고 일부 지역에서 유독 심하게 터졌다는 사실이다.

그런 곳들은 정의(正義)로운 의지가 충만한 정치·종교 엘리트가 지배한다는 특징이 있다.

독일의 밤베르크가 대표적이다.

이 작은 도시에서 1617년 한해에만 102명을 불에 태워 죽이더니, 마녀위원회라는 특별 기구를 만들어 1626년부터 1630년까지

630명을 구금하여 고문 끝에 대부분 화형(火刑)에 처했다. 이런 시기에는 불똥

이 어디로 튈지, 누가 언제 희생될지 아무도 모른다. 처음에는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이 주로 희생되다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누구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 어제의 재판관이 오늘 마녀·마법사로 몰려 처형될 수도 있다.

지배자의 정의로운 행위에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다.

굳건한 신앙심과 도그마에 함몰된 지배층이 한껏 달아오른 민중 에너지를 이용하고 더욱 몰아붙이려 할 때

최악의 일들이 벌어진다. 신성하고 정결한 나라를 만들려면 부정한 죄인들 그리고 감히 여기에 편드는 불량한 배신자들을

말끔히 없애야 하기 때문이다.


마녀사냥은 18세기를 지나며 대부분 유럽 국가에서 종식되었다. 누군가를 악마의 하수인인 마녀로 몰아 처형하는,

문자 그대로의 마녀사냥은 사라졌다. 그렇지만 그 비슷한 현상은 그 이후에도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사회적·정치적 갈등을 어떤 식으로든 해소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악마화된 적(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집단 처형한 히틀러 체제가 대표적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두고 마녀사냥이 벌어지는 곳이라고 하면 물론 과장이다.

다만 자칫 그 방향으로 치달을 위험성이 농후하다는 점은 꼭 지적하고 싶다.


현재 우리 사회는 아무리 봐도 그악스럽기 그지없다.

관용은 잊은 지 오래고, 뜨거운 증오를 퍼부을 준비는 늘 완료 상태다.

잘못을 범한 사람을 징계하고 처벌하는 거야 당연하지만, 문제는 그 정도가 심하다는 데 있다.

'국민 정서'나 '민중 정서'라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기준에 한번 걸려들면 끝장이다.

신체적으로 죽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영혼이 탈탈 털린 산송장 상태로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정치권의 지극한 정의로움이다.

지난 시대의 사악함을 옹호할 생각도 없고 잘못을 범한 사람의 처벌을 비난할 의도도 없지만,

혹시나 홀로 선하다는 의식에 취하여 균형을 잃지 않을까 걱정이다.

다른 시대에는 다른 정의로움이 새 마녀들을 만들어내는 역사가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