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1.25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대의명분에 약한 대중 감성에 호소해 의혹 분산시키고
'진영 대립'과 '정치 마케팅'을 결합해 정치적 목표 녹여 넣어
한 정치인의 돌출 행위 넘어 대중 영합 정치의 위험성 증명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손혜원 의원이 전대미문의 전투력을 과시하고 있다.
정치인에게 치명적인 부동산 투기 의혹을 희석할 정도의 능력이다. 갈수록 혼전(混戰)이 되어가는
'손혜원 사태'의 비밀을 그의 기자회견이 보여준다.
특히 이달 20일에 한 기자회견이 흥미롭다. 상표 네이밍(naming·命名)에 특화된 마케팅 전문가인
자신의 장기(長技)를 극대화했다. 여기서 손 의원은 "대중을 움직이는 일이라는 점에서 마케팅과
정치가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대중을 움직이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손 의원의 자신감이 빈말만은 아니다. 그는 숱한 히트작 상품명을 만든 홍보 전문가다.
대중을 움직여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손 의원이 구사하는 브랜드 전략은 세 가지다.
낙후된 옛 도심(都心)을 살려내는 '도시 재생의 대의(大義)', '호남 살리기', 그리고 '문화재 살리기'가 그것이다.
모두 시대적 명분과 감성적 소구력을 갖춘 브랜드 전략이다.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을 이런 '아름다운 네이밍' 전략으로
맞받아치고 있다. 대의명분에 약한 대중의 감성에 호소해 의혹을 흩어버리는 방법이다.
손 의원은 '적과 동지의 대립'이라는 정치 문법에도 능수능란하다.
기자회견 끝에 더불어민주당 당원들과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을 향한 격정적 호소를 덧붙였다. 자신이 민주당 당명을
만든 창업 공신(功臣)이자 '문 대통령 만들기'의 선봉장임을 상기시키는 브랜드 작업이다. 이는 손 의원 개인의 위기를
문재인 정권 및 진보 진영의 위기와 동일시하는 담론 효과를 겨냥한 것이다. 그 결과, '악의적인 가짜 뉴스'를 퍼트리는
적폐 세력과 맞서 싸우는 '진보적 문화산업의 선구자 손혜원'이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만들어졌다.
즉각 대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동산 투기라는 원래 쟁점은 사라지고 진영 대결이 부각되었다.
민주당은 물론이거니와 SNS를 비롯한 공론 영역에서도 손 의원의 선의(善意)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손혜원 사태가 진영 대립의 난전(亂戰)으로 확장되면서 옳고 그름을 나누는 판단 준거 자체가 타격받고 있다.
진영 싸움이 득세할수록 생활인의 상식과 균형 감각이 무뎌진다.
한국 사회에서 진영 논리는 모든 걸 덮어버리는 마법의 양탄자다.
하지만 손 의원이 설령 전투에서 승리해 정치적으로 살아남는다고 해도 한국 민주주의의 심각한 내상(內傷)이 불가피하다.
손혜원 사태에서 가장 위험한 건 '대중을 움직이는 방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홍보 전문가의 정치 마케팅이
잘 먹혀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대중을 조작(操作)해 진실을 가리는 수준을 넘어 권력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진실'을 대중의 동의와 지지로 얼마든지 증식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진짜 뉴스와 가짜 뉴스의 차이를 무력화하는 선전과 홍보 작업이 선결 조건이다.
손혜원 사태는 고질적 진영 대립과 최신식 정치 마케팅을 결합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내재된 포퓰리즘이라는 맹수를
풀어놓는 권력 공학의 생생한 현장이다. 정치의 주체이자 나라의 주인이라는 대중의 자의식 속에 특정한 정치적 목표를
자연스럽게 녹여 넣는 권력 기법이 성공적으로 가동되고 있다.
손 의원의 전투력에 환호하는 대중의 출현이 그 증거다.
마케팅과 정치의 유사성 덕분에 정치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는 손 의원의 변(辯)이 많은 걸 말해준다.
그러나 마케팅과 정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공사(公私)의 엄격한 구분이 그것이다.
마케팅이 사적 이익의 극대화를 꾀하는 데 비해 정치는 공공의 이익을 지향한다.
그런데 손혜원 사태에는 일관된 특징이 발견된다.
매사에 공과 사를 뒤섞으면서도 자신의 사적 이익 추구 자체가 공공에 대한 봉사라고 강변한다.
사실 공사 영역의 착종(錯綜)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여된 공인이 너무나 많다는 것은 한국 사회 전체의 고질병이다.
'대중을 움직이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한 정치인의 위세는 포퓰리즘의 유혹에 휘둘리는 한국 사회의 취약성을 웅변한다.
대중심리 조작과 감시받지 않는 권력이 얽힐 때 민주정치의 법과 제도는 능멸 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는 밖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온다. 손혜원 사태는 한 정치인의 돌출 행위가 아니다.
한국적 대중 영합 정치의 치명적 위험성을 증명하는 징후적 사건이다.
포퓰리즘이야말로 한국 정치의 블랙홀이다.
대중주의라는 맹수가 손혜원 사태를 난투극으로 키우고 있다.
포퓰리즘과의 정면 대결 없이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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