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 갈등은 빙산의 일각
IT 기술·인재 놓고 제로섬 전쟁
국운 건 경쟁에 한국만 외딴섬
요즘 미국 실리콘밸리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다. 여전히 화창한 날씨에 겉으론 무척 평온해 보이지만 수면 밑에선 치열한 정보기술전이 벌어지고 있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자동주행, 사물인터넷(IoT) 등 최첨단 기술을 놓고 중국과 벌이는 싸움에선 긴박감마저 묻어난다. 특히 이곳에는 중국계 자본이 깊숙이 침투해 있고, 중국계 엔지니어와 기업인들이 포진해 있어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얼마 전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한 스탠퍼드대 동료 교수 장서우성(張首晟) 박사가 생각난다. 그는 유학생 출신으로 노벨상 후보로도 꼽히던 물리학자다. 중국 정부의 해외 인재 유치 프로그램인 ‘천인(千人) 계획’에도 선발돼 중국과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또 베이징(北京) 지방정부 자본으로 설립된 중관춘(中關村) 개발그룹 등의 지원으로 약 5000억 원 규모의 벤처펀드를 만들어 실리콘밸리 지역 100여 개 첨단기술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주도하기도 했다. 미 무역대표부는 최근 ‘301조 특별보고서’를 통해 중국 정부가 벤처 캐피털을 미 첨단기술 유출과 지식재산권 획득의 통로로 이용하고 있다는 예로 장 교수가 설립한 ‘단화 캐피털’을 지목한 바 있다. 화웨이 창업자의 딸인 멍완저우(孟晩舟) 부회장이 캐나다 공항에서 체포된 날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장 교수, 이 두 사건은 단순한 우연일까.
미·중 간 무역협상이 타협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이는 일각에 불과하다. 수면 아래 있는 큰 빙산은 정보기술(IT) 싸움이다. 무역문제는 완전한 해소도 어렵지만, 전면적인 갈등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작다. 정치적·심리적 요소가 다분한 데다 갈등이 지속되면 양국 모두에 손해이기 때문이다. 반면 정보기술전은 제로섬 게임이다. 양국 모두 한 치의 양보도 어렵다. 중국은 ‘기술 굴기’를 선언하며 ‘중국 제조 2025’로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다. 국영기업 등을 앞세워 미국 내 첨단기술 분야에 공격적인 투자를 할 뿐 아니라 ‘천인 계획’을 통해 해외에 퍼져 있는 우수한 중국계 글로벌 인재를 대거 스카우트하고 있다.
공학박사로 30년 넘게 실리콘밸리의 한복판에서 일하고 있는 지인은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면서 “5년 내 결과로 향후 50∼100년의 운명이 좌우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미·중 간 싸움이 만만치 않아 걱정이라고 했다. 가장 뜨거운 분야인 AI만 해도 대부분의 기술이 오픈 소스라 미·중 간 수준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기술 못지않게 중요한 빅데이터 부분에서는 오히려 중국이 유리하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기술, 인력, 데이터 등 미래의 운명을 좌우할 분야에 중국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적극 나서고 있다. 미국으로서도 잠재적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AI, 자동주행, IoT 등 차세대 기술에 매우 중요한 5G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화웨이를 미국이 기소하겠다는 것도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30여 년 전 일본기업에 힘없이 밀리던 미국 기업들이 대역전할 수 있었던 것은 첨단기술력에 있었다. 1989년 당시 자산 기준으로 글로벌 톱 5가 모두 일본 기업이었지만, 2018년에는 애플, 아마존, 알파벳(구글 모기업),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모두 IT 관련 기업으로, 첨단기술력을 바탕으로 단기간에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89년 톱 50에 32개이던 일본기업은 30년이 지난 지금 토요타자동차만이 35위로 유일하게 50위권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향후 정보기술력에 따른 기업의 부침은 더욱더 심해질 것이다. 10년 후 누가 톱 기업이 될지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비판적인 실리콘밸리에서조차도 중국과의 정보기술전의 최전선에서 분투하는 그의 정책만큼은 지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이유를 알 만하다.
한국에선 이런 긴박감은 찾기 어렵다. 소득주도성장론, 최저임금 문제 등에 매몰돼 싸우는 모습을 보면 마치 글로벌 바다에 떠 있는 외딴섬이란 느낌마저 든다. 대통령이 청와대로 기업인들을 부르고 총리가 대기업을 방문해 격려하는 모습에는 국가주도형 산업화 시대의 잔영이 어른거린다. 치열한 정보기술전이 펼쳐지고 있는 글로벌 무대의 냉혹한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행보다. 반도체 등에 선도적인 기술투자를 했던 삼성이 글로벌 16위 기업에 오른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정책 패러다임의 전환 없이는 한국기업들의 미래도 결코 장담하기 어렵다.
공격적인 연구·기술투자, 기업을 옥죄는 규제의 완화와 정치적 압박의 해소, 글로벌 인재를 유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며 정보기술전에 임할 채비를 해야 한다. 21세기 국운이 걸린 일이다. 재벌 총수들과 텀블러를 들고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는 모습도 좋지만, 전운이 감도는 실리콘밸리의 현장을 찾는 대통령이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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