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2.13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91년 5월 2일 국립공주박물관 김길식 학예사와 남궁승·이호형 연구원은 충남 천안 화성리 일대에 대한 지표 조사에
나섰다. 1969년 그곳에서 중국 동진 청자와 백제 유물이 다수 발견된 적이 있어 관련 유적이 분포할 것이라 예상했다.
승합차를 타고 마을로 들어서는 순간 포클레인으로 땅을 판 흔적이 일행의 눈에 들어왔다.
환두대도(세부), 화성리A-1호묘, 국립공주박물관.
그곳엔 절반가량 깨진 토기 한 점이 나뒹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백제 토기였다. 깊게 파인 구덩이 벽면에서
길이가 2.7m인 목관묘 윤곽과 그 속에 묻힌 철기를 확인했다.
공사가 재개되거나 큰비라도 오면 유적이 멸실될 것은
자명했기에 긴급 조사에 들어갔다. 남아 있는 흙을 조심스레
걷어내니 바닥에 환두대도와 쇠창이 한 점씩 남아 있었다.
박물관으로 복귀해 유물을 정리하던 김 학예사는
대도의 둥근 고리 쪽 색깔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곤
곧바로 공주 시내 한 내과를 찾았다.
어디가 아픈지를 묻는 원장에게 "실은 이 칼이 아파요"라며
X-선 촬영을 부탁했다. 원장은 갑작스러운 부탁에 놀라면서도
촬영을 허락했다. 곧이어 필름을 확인하는 순간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났다. 둥근 고리 전면에 유려한 당초 무늬가
상감(象嵌)되어 있었던 것이다.
상감이란 쇠에 좁은 홈을 파고 그 속에 다른 금속을 끼워 무늬를
표현하는 고급 기술이다. 이 대도는 백제 유적에서 발굴된 최초의
상감 유물로 기록됐다.
공주박물관 관계자들은 이 대도를 서둘러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로 옮겼고, 이상수 담당관은 정밀한 보존 처리 과정을
거쳐 은선으로 표현된 당초문을 드러냈다.
김 학예사가 이 대도를 일본으로 전해진 칠지도(七支刀)와
마찬가지로 4세기 무렵 백제 왕실 공방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라
발표하자 한·일 양국 학계 반응은 뜨거웠다. 가까스로 멸실의 위기를 넘긴 화성리 대도에는 글로벌을 지향하며
새로운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자기화한 다음 그것을 이웃 나라로 전해주던 백제 문화의 한 단면이 오롯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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