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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37] 류큐와 조선의 운명 가른 동맹 외교

바람아님 2019. 4. 12. 10:12

(조선일보 2019.04.12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임진왜란은 1598년에 종료되었지만 일본의 동아시아 질서 흔들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609년 3월 가고시마의 시마즈(島津) 가문은 오래전부터 벼르던 류큐(지금의 오키나와) 원정에 나선다.

전쟁은 한 달 만에 시마즈군의 완승으로 끝났고, 류큐의 상령(尙寧)왕은 일본으로 송환되어

시마즈가와 도쿠가와 막부에게 신종(臣從)을 서약해야만 했다.

이후 류큐의 입지는 불우한 것이었다. 시마즈가는 류큐를 부용국(附庸國) 취급하며 조공을 강제했다.

다만 류큐의 중국 조공국 지위는 건드리지 않았다. 이른바 이중조공국화(化)였다.

류큐는 시마즈가 진공(進貢) 외에도 막부에 사절을 보내 군신의 예를 표해야 했으니 사실상 삼중조공국 신세였다.


류큐는 신주단지처럼 믿던 종주국 명의 보호를 기대하였지만, 조선에서 일본과 대적하느라 국력이 소진된 명은

고민에 빠진다. 북방의 이민족 발흥 조짐도 심상치 않았다. 명은 자국 안보에의 위협 정도를 가늠하면서 류큐 문제를

관망하였고, 일본도 이번에는 지나치게 명을 자극하는 것은 피하고자 했다.


두 세력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류큐를 둘러싸고 형성된 강대국 세력 균형하의 (변형된) 분할·지배 체제를

'양속(兩屬) 체제'라고 한다. 이때의 복속이 화근이 되어 류큐는 1879년 일본 영토로 편입된다.


사실 류큐의 운명은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도 일본은 조선 할지(割地)를 획책한 바 있다.

할지론은 전쟁 내내 일본과 명 사이를 오갔고, 누구도 조선의 국토 보전을 장담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한반도에 드리워져 있었다. 할지론을 무산시킨 것은 명이 중화 체제 수호 관점에서 조선 방어에 부여한 국익의 크기였다.

명과 조선을 안보 공동체로 묶기 위해 조선이 기울인 노력도 명의 인식을 거들었다.

그 지점에서 조선과 류큐의 운명이 갈렸다. 자존·자강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나 대국의 논리를 살펴

자국 안전을 도모하는 동맹 외교가 중소국의 안전에 더욱 긴요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