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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의 말과 글] [94] 나를 뺀 세상의 전부

바람아님 2019. 4. 13. 20:32

(조선일보 2019.04.13백영옥 소설가)


백영옥 소설가백영옥 소설가


선물하기는 늘 어렵다. 해야 할 때도, 하고 싶을 때도 그렇다.

누군가의 선물을 고민하다가 김소연의 책 '나를 뺀 세상의 전부'를 읽었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그림책을 종종 선물한다는 문장을 발견했다.

'우선 받는 이가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받아들고서 씨익 웃고, 그 자리에서 펼쳐본다.

그림으로 가득 차 있고 문장은 최소한이어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그 자리에서 넘겨본다… 나도 머리를 맞대고

함께 들여다본다… 내가 건넨 책으로 독서를 하는 표정을 그 자리에서 지켜볼 수가 있다.'


10분 안에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이 되는 기분은 어떨까. 멋질 것 같다.

이 책을 읽다가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두껍고, 한정 없이 글자가 많은 책을 선물한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림책은 좋은 대안 같았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책 선물과 관련된 가장 인상적인 얘기는 고인이 된 황현산 선생의 책 '밤이 선생이다'

선물 받았던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글에서 읽었다. 어느 날 선물로 받은 선생의 책을 살펴보다가

그는 책에 직접 서명을 하지 않고, 따로 작은 메모지를 붙여서 자신의 이름을 사인한 걸 발견한다.


도무지 영문을 몰랐다가 훗날 그것이 자신의 졸저를 다 읽으면 서명 쪽지를 떼어 버리고 중고 서점에 팔라는 뜻으로

한 선생의 배려라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작가의 사인 본은 매매하지 않는 중고 서점의 원칙을 배려한 것이다.

'이런 종류의 배려를 하는 어른을 잃었구나' 싶어 울컥했다.

자신의 쓰임이 다한 후에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택한 사람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날 '나를 뺀 세상의 전부''밤이 선생이다'를 번갈아 읽으며 내가 느낀 건 큰 선물을 받았다는 행복감이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온통 내 꿈, 내 계획, 내 목표에 집중되던 때를 통과한 사람들이 본 세상 풍경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거울로 보는 '내'가 아닌 창문으로 비춰보는 '나' 속엔 세상의 풍경이 스며 더 잘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