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日常 ·健康

[윤대현의 마음읽기] 지구를 떠나면 후회한다

바람아님 2019. 6. 27. 11:59

(조선일보 2019.06.18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어디로 떠나고 싶으세요' 물으면 '지구를 떠나고 싶다' 답변 많아
마음의 에너지 고갈되는 '번아웃'… 일 위주로 살다보면 찾아와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어디로 떠나고 싶으세요'란 질문을 종종 던진다.

논리적 정답이 없는, 상대방 마음에 던지는 일종의 은유적 소통이다.

'제주도에 가고 싶어요' '따뜻한 온천에 가서 피로를 풀고 싶어요' 같은 대답은 여행 욕구를 반영하는

일반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특이한 대답을 하여 당황스럽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면 '지구를 떠나고 싶다'는 분이 꽤 많다. 여행의 느낌과는 다른 싸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대책 없이 멀리 떠나고픈 마음이 들 때 모든 걸 정리하고 떠나면 마음에 쉼이 찾아올까.


도시를 떠나 섬 같은 자연 친화적인 곳이나 바다 건너 먼 외국에 가서 생활하는 리얼리티 방송이 인기가 있다.

시청하다 보면 직장을 쉬고 조용한 곳에 가서 일 년 정도 푹 쉬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해지지만 현실적으로 어렵기에

생각으로 끝나고 마는데 용기 있게 실천하는 분들이 있다. 다니던 회사를 정리하고 조용한 곳에 내려가 일이 년 쉰 후

다시 열심히 사회생활을 하겠다며 내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찾아와 '망했다'고 하는 분이 적지 않다.

조용한 곳에 갔더니 머리는 더 복잡해지고 멀쩡한 직장만 그만둬 스트레스가 열 배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지난달, 세계보건기구가 마음의 에너지가 고갈되는 '번아웃(burnout)'을 직장 스트레스에 따른 증후군으로

구체화하여 정의했는데, 이 번아웃이 찾아왔을 때 흔하게 보이는 현상 중 하나가 '심리적 회피 반응'이다.

사람이 긍정적이라는 것이 현재 고민거리가 전혀 없는 상태는 아닐 것이다. 아무리 얼굴이 편해 보이는 사람도 몇 가지

고민은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인생이다. 이렇게 현재는 항상 좋은 것과 불편한 것이 뒤섞여 있지만 내 눈이 좋은 쪽을 향할 때

거기서 긍정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다. 그런데 마음이 지치게 되면 똑같은 상황에서도 부정적인 쪽으로 자꾸 눈이 간다.

그러다 보니 현재가 싫어지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픈 마음이 차 오르는 회피 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20년간 한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신 50대 남성분에게 번아웃이 찾아왔다.

에너지가 없어져 일하기가 싫고 그래도 밀어붙여 객관적 성과를 이루었는데 주관적 만족이 없다고 한다.

마음이 지치게 되면 내가 이룬 것들의 의미가 잘 느껴지지 않고 그래서 마음이 더 지치게 된다.

그리고 주변 사람에게 까칠한 언행이 툭툭 튀어나오고 사람 만나기가 싫어진다는 것이다.

번아웃이 되면 공감 에너지가 쪼그라들어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분께 심리적 회피 반응이 염려되어 '잘못 사신 것은 아니고 일 위주로 사시다 보니 일과 삶의 균형이 무너져

마음이 지치는 번아웃이 찾아온 것 같습니다.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는 중요한 결정은 좀 뒤로 미루시고 우선 마음 충전부터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라고

우회적으로 말씀드리니 진료 후에 회사에 가 20년 다닌 회사를 그만두려고 서류 가방에 사표를 미리 써 가져왔다고 하신다.

일단 사표 제출을 보류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찾는 쪽으로 노력하신 후 마음이 회복되어 직장을 잘 다니고 계신다.

새로운 도전과 변화는 멋진 일이다.

러나 여기가 싫어져 어디로 가고 싶을 때는 우선 내 마음을 위로하는 시간을 먼저 가질 필요가 있다.


여름휴가가 예정되어 있다면 슬슬 바캉스 계획을 짜야 할 시기이다. 바캉스의 어원이 '자유로움'이라 한다.

실제 자유로움은 우리 마음에 행복감을 가져다 주고 지친 마음을 재충전해 주는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그 자유로움을 느끼기 위해 열심히 여행지, 숙소, 그리고 교통편도 알아보고 여행지에 가서 많은 피서객과 부대끼며

최선을 다해 휴가를 보내고 왔는데 막상 자유로움을 느낀 순간이 여행 마치고 집에 돌아온 순간이었다는

분이 많으니 '웃기면서도 슬픈' 현실이다. 자유를 위한 휴가가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마음이 지친 상태라면 복잡하고 화려한, 그리고 먼 곳으로 여행 가기보다는

소박하고 조용한 그리고 가까운 곳으로 여행하기를 추천하고 싶다.

긴 교통 시간과 이국적 환경이 번아웃 상태에서는 오히려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스마트폰도 매일 충전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도 일년에 한 번 충전 여행으로는 한계가 있다.

평일 10분, 주말 1시간, 그리고 분기에 하루 정도는 나만의 미니 바캉스 노하우를 개발하여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을 즐기는 것이 꼭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