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7.09 윤덕민 한국외대 석좌교수·前 국립외교원장)
한국, 동북아의 동네북 신세
최고 외교관에 어려운 일 맡겨야 외교엔 코드 없고 국익만 있어
강대국 설득하려면 국제법·국제규범 지켜야
윤덕민 한국외대 석좌교수·前 국립외교원장
일본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동경에서 열린 중·일 의원 교류 모임에서 중국 측 인사가 일본은 왜 한국에 그렇게 쩔쩔매느냐고
물으면서 '사드를 봐라, 중국이 세게 나오니까 한국이 납작 엎드리지 않았느냐.
일본도 중국처럼 한국을 강하게 다루라'고 조언을 했다고 한다.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한국이 언제부터 이놈 저놈 다 때리는 동네북 신세로 전락되었는지?
아베 총리는 중국을 흉내 내어 치졸하게 한국을 보복한다.
시진핑 주석의 중국도 원조답게 사드 보복을 접지 않고 화웨이 보복도 위협한다.
럭비공 트럼프 대통령은 언제 주한미군 철수를 운운할지 조마조마하다.
트럼프와 브로맨스에 빠진 김정은은 핵을 갖고 우리를 무시하고 한반도 주인 행사를 한다.
국제질서도 자유무역 원칙도 도덕도 정의도 없이 힘만 있는 정글 한복판에 한국이 놓여 있는 느낌이다.
국권을 상실했던 구한말 우리를 다시 보고 있다. 방치에 대책도 없고 국내 정치 논리에 급급하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전략보다 사람이 우선이다. 외교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리콴유 총리는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갖는 싱가포르를 만든 비결을 언급한 적이 있다.
나라가 잘되려면 가장 뛰어난 최고 인재들에게 가장 어려운 직무를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만큼 최고 인재가 공무원에 몰려 있는 국가도 없다. 지금도 수십만의 젊은이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 최고 인재들은 어디에 있는가?
코드 탓에 적폐 탓에 정부 조직에서 설 자리를 잃거나 복지부동 중이다.
외교란 인적 네트워크가 중요하다.
좋은 외교관은 문제가 발생하면 주재국의 누구를 만나고 통해야 해결할 수 있는지의 인적 네트워크를 갖는다.
이런 네트워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막대한 국민 세금이 투입되고 시간이 축적되어야지만 국가가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외교관과 인적 네트워크가
만들어질 수 있다. 대체 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미국, 일본, 핵 문제를 담당했던
베테랑 외교관들이 일선에서 배제되어 대기 중이거나 옷을 벗고 있다. 그들이 구축한 네트워크와 노하우도 사장되고 있다.
국제 무대에서 대한민국의 존재감도 점점 약해지고 있다.
워싱턴에서 우리 빈자리를 일본 외교가 다 채워가고 있는 느낌이다.
외교에 코드란 없다. 시진핑도 아베도 외교 본질은 똑같다. 국익만 있을 뿐이다.
코드 인사에서 벗어나 최고 인재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을 맡겨야 한다. 우리 외교관들을 다시 뛰게 하자.
김대중 대통령이 경제 관료를 적폐로 몰아 내쳤다면 IMF 사태를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경제 관료를 신뢰했고 관료들은 위기 극복을 위해 헌신했다. 관료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고 최상의 성과를 내게 하는 것이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그 기본은 코드와 회전문이 아닌 적재적소에 능력 있는 인재를 배치하는 공정한 인사다.
우리는 중국, 일본, 러시아라는 세계 최강의 강대국들로 둘러싸인 최악의 지정학 조건에 놓여 있다.
우리가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강대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약소국은 그것을 인내해야 한다'고 국제정치 본질을 갈파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적했듯이 군사력보다 대화가 중요하다. 그러나 무조건 대화를 한다고 상대방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리 만무하다. 힘의 배경 없이 상대방을 대화로 설득하려면 높은 수준의 '지혜와 이치'가 필요하다.
한국 외교가 힘이 아닌 이치로 설득할 수 있는 재료가 바로 국제법과 국제규범이다.
주변국을 상대로 한국 외교가 갖는 중요한 무기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국제규범, 국제법을 지키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국가 간 합의였던 위안부 합의를 일방적으로 깼고, 대법원은 국제법·국제정치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강제징용의
개인청구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한·일 양국은 강제징용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조약에 명기했다.
선진 국가에서 사법부가 조약에 명기된 내용을 뒤집는 판결을 내리는 경우는 없다.
일본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국제규범을 한국이 지키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경제 보복을 단행했다.
10년 전 G20 정상회담을 개최한 한국은 세계 금융 위기를 가장 빠르게 극복한 신예 선진국으로 G7의 한계를 보완할
글로벌 행위자로 촉망받았다. 지금 우리 모습은 어떠한가? 세계에서 우리 역할을 다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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