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동양화가 말을 걸다]① 이런 노년이면 안분지족인 것을…

바람아님 2013. 12. 26. 23:32
▲ 전기의 ‘매화서옥도’ 19세기 중엽, 종이에 엷은 색, 32.4×36.1㎝ 국립중앙박물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有朋自遠方來)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不亦樂乎)?’
   
   반가운 친구가 찾아왔을 때의 즐거움을 일깨워 주는 이 글은 논어(論語)의 첫 장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두 번째 문장이다. 그런데 보석 같은 이 문장은, 바로 앞에 나오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라는 문장의 유명세에 밀려 만년 2인자의 자리를 면치 못했다. 중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특별히 한문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이 정도는 기억할 것이다.‘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해석과 함께 ‘학이시습지…’라는 원문을. 예전에는 첫 번째 문장이 최고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점점 나이 들어가면서 두 번째 문장의 진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것은 기쁜 일이다. 더하여 혼자 느끼는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벗이 있다면 더욱 기쁘고 즐거울 것이다. 책을 읽다 온몸이 전율하듯 멋진 문장을 발견했을 때 친한 벗에게 전화해서 자랑하고 싶었던 순간을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했을 것이다.
   
   
   연둣빛에 기다림을 담다
   
   ‘배우고 때로 익히는 기쁨’이 개인적 차원이라면 ‘벗이 있어 찾아오는 즐거움’은 공감의 차원이다. 이 즐거움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고람(古藍) 전기(田琦·1825~1854)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이다. 눈이 소복이 쌓인 날, 매화꽃이 눈꽃처럼 휘날린다. 이런 날은 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감히 매화꽃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된다. 출렁거리는 마음을 무시한 채 책만 읽을 정도로 무례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를 무시해도 좋다. 이 정도 외도로 자책한대서야 어디 각박해서 살 수 있겠는가. 떠밀리며 살아온 시간을 내려놓고 잠시라도 꽃을 향해 외도를 해볼 수 있는 사람만이 남은 길을 싱싱하게 떠날 수 있다.
   
   역시 그림 속 주인공은 아름다움에 대한 예의를 아는 사람인 듯하다. 서재에 앉아 매화를 감상하던 선비가 피리를 들었다. 흥에 겨워 피리를 불자 지나온 자리마다 폐허로 가득했던 과거 위에 꽃잎이 떨어진다. 피리 소리와 꽃잎의 춤사위에 서늘한 슬픔이 따뜻해진다. 파렴치한 외로움은 허물어지고 참혹했던 그리움마저 슬그머니 빗장을 푼다. 친구의 마음이 전해진 걸까. 거문고를 어깨에 메고 다리를 건너는 선비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빨리 가서 피리 소리에 맞춰 거문고를 뜯기 위함이다. 백아와 종자기가 아니라도 오랜 세월 마음을 나누다보면 누구나 지음(知音)이 된다. 지음은 굳이 연인이 아니라도 ‘소리 없는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는’ 사이다. 그러고 보니 서재 안의 선비가 창문을 열어 두었던 까닭이 꼭 매화 때문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오늘 찾아오기로 한 지음이 어디쯤 오고 있을까, 기다리고 있음이렸다.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이 연두색이라면 달려가는 사람의 마음은 붉은색이다. 눈 덮인 산과 언덕 곳곳에 봄의 발자국처럼 찍혀 있는 연두색은 아침부터 창문 열고 친구를 기다린 사람의 마음이다.
   
   
   선비들의 매화 사랑
   
   오른쪽 구석에 ‘역매 오경석이 초옥에서 피리를 불고 있다(亦梅仁兄草屋笛中)’라고 적혀 있어 방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혀 놓았다.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1831~1879)은 대수장가요 감식가였는데, 우리나라 최초로 미술사를 정리한 ‘근역서화징’의 저자 오세창(吳世昌·1864~1953)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오경석보다 6살 많은 전기가 친분이 두터웠던 오경석을 위해 그려준 것으로 이들 모두 조희룡(趙熙龍·1797~1859)이 만든 문학동인 ‘벽오사(碧梧社)’의 회원이었다. 두 사람 모두 중인으로 전문화가는 아니었다. 전기는 약재상이었고, 오경석은 역관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모두 그림으로 기억한다. 직업은 잊혀지기 쉬워도 예술작품은 오래 그 여운이 남는 법이다.
   
   조희룡을 필두로 한 조선 말기 화가들은 특히 매화를 사랑하여 ‘매화도’를 많이 그렸다. 오경석의 호가 ‘또한 매화’라는 뜻의 ‘亦梅’인 것만 봐도 어지간히 매화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조희룡의 매화 사랑도 그에 못지 않았다. 조희룡은 매화백영루라는 편액이 걸린 방에서 매화가 그려진 병풍을 둘러쳐 놓고, 매화 벼루에 매화 먹을 갈아 매화에 관한 시를 썼다. 가끔씩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매화 차를 마시며 가슴을 적시곤 했으니 이 정도가 되면 ‘매화 매니아’를 넘어 ‘매화 오타쿠’라고 해야 적당할 것 같다.
   
   그런데 매화는 조선 말기의 일련의 오타쿠가 등장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최초로 매화에 관한 책 ‘범촌매보(范村梅譜)’를 쓴 송대(宋代)의 학자 범성대(范成大)는 매화를 ‘천하의 으뜸이며, 높은 품격과 빼어난 운치를 겸비한 꽃’이라 극찬했고, 동 시대를 살았던 장공보(張功甫)는 ‘자태와 운치가 외롭고 빼어나서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운을 띄웠다. 그렇게 시작된 매화 예찬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마음을 흔들더니 급기야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선생에게서 절정에 도달한다. 매화를 극진히 사랑하여 매화 시 100여수를 남긴 퇴계 선생이 마지막 눈을 감을 때 남긴 유언이 ‘매화에 물을 주라’였다.
   
   
   돈보다도 거문고 들고 올 친구를 만들자
   
   매화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많은 이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힘든 환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기 때문이리라. ‘추울 때에 더욱 아름다우며, 호젓한 향기가 뛰어나고, 찬바람과 눈보라에 시달리면서도 곧은 마음을 간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눈 속에 피어나는 설중매(雪中梅)를 보며 자신이 현재 겪고 있는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다. 때로 시련이 인생의 품위를 무참하게 떨어뜨려도 지조를 잃지 않고 살아간다면 다시 꽃을 피울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얻었다. 나는 누가 살짝만 건드려도 칼날같이 예리해지는데 맹추위를 밀쳐내는 무기라는 것이 기껏 연약한 꽃잎이라니. 살짝 부끄러울 때도 있다. 부끄러운 내가 나 혼자의 몫으로 추위를 외로워할 때, 거문고 들고 찾아오는 친구는 나눔과 위로다. 추위를 함께 견뎌줄 수 있는 동지이자 반려자다.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의 세 번째 문장은 무엇일까?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이다. 젊은 시절 배우고 익히는 기쁨을 알고 난 후 나이 들어 벗의 소중함을 알았다면, 굳이 명예가 없어도 노여워할 이유가 없다. 혼자 있을 때의 충만함 위로 마음을 나눌 친구까지 왔는데 높은 벼슬을 하지 못했다한들 무에 그리 서운하겠는가. 그만하면 됐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거친 밥에 야채만 먹는 노년이라도 이 정도 삶이라면 안분지족이다. 내 맘 알고 네 맘 알 수 있으니 외로울 일 없고 고독하게 죽어갈 일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준비할 것은 돈보다도 거문고 들고 올 친구를 만드는 일이다. 아니, 내가 피리를 불며 먼 곳에 사는 친구가 찾아오고 싶은 그런 친구가 되는 것이다. ‘매화서옥도’를 보며 꿈꿔 본 은퇴 후 모습이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