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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41] 혁신이 거부된 조선 도자기의 운명

바람아님 2019. 7. 21. 19:05

(조선일보 2019.06.07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임진왜란은 일본에서 '도자기 전쟁'으로 불린다. 전쟁의 승패를 떠나 전쟁 와중에 조선 도공을

확보한 것이 그만큼 일본 역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자기(磁器) 생산기술이 없었다.

그때까지 자기를 생산한 나라는 중국, 조선, 베트남 3국뿐이었다.

전쟁 통에 일본에 오게 된 도래(渡來) 도공들이 일본 도자기에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도조(陶祖)로 추앙받는 이삼평(李參平)이 1610년대부터 사가(佐賀)번의 아리타(有田)에서 자기를 굽기 시작하자

일본은 단숨에 도자기 선진국으로 도약한다.


아리타의 도요(陶窯)에서는 청화자기가 생산되었다.

조선의 원천 기술로 고스(吳須)라는 청색 안료(顔料)를 수입해 중국풍의 문양을 넣은 다문화 도자기였다.

17세기 이후 일본에서는 고품질 청화백자가 유행했지만, 정작 조선에서는 청화백자를 굽는 도요를 찾기 어려웠다.

조선에서 청화백자가 드물어진 것은 인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안료인 회회청(回回靑)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회회청은 서역(西域) 원산의 코발트계 광물로 중국도 교역을 통해 어렵사리 확보하고 있는 희소재(材)였다.

조선은 중국에 사절을 보내 회회청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번번이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일본은 사정이 달랐다.

일본은 무역을 통해 회회청을 입수할 수 있었다. 고스가 바로 회회청이다. 나가사키가 중국과의 무역 거점이 되고,

포르투갈·네덜란드가 구축한 해상 교역망에 개방된 것이 일본과 조선의 도자기 경로를 갈랐다.


세계 최고 수준이던 조선의 도자기 기술이 17세기 이후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할 때 중국과 일본의 채색(彩色) 자기는

혁신을 거듭하며 유럽까지 진출하여 막대한 이익을 창출했다.

도자기 선진국 중 조선만은 이러한 흐름과 동떨어진 도자기의 갈라파고스로 남았다.

이념이 앞서고 혁신이 거부되는 폐쇄적 체제하에서는 우수한 기술이나 인재가 도태되고 사장(死藏)되기 마련이다.

현대에도 통용되는 보편적인 역사의 교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