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무릎 꿇은 외교관

바람아님 2019. 10. 5. 10:02

(조선일보 2019.10.05 임민혁 논설위원)


1793년 청나라 수도 북경에 도착한 영국 사절단이 건륭제 알현을 청했다.

황실은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갖출 것을 요구했다.

청이 예외 없이 적용하는 황제에 대한 예법이었지만 영국 사절단은 못하겠다고 버텼다.

청측이 황제 뒤편에 영국 왕 초상화를 걸어놓는 '타협안'을 내놓은 뒤에야 사절단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청의 국력이 쇠퇴하면서 서구 열강 외교관들은 하나같이 무릎 꿇기를 거부하고 입례(立禮)로 황제를 만났다.


▶두 발로 서는 존재인 인간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가장 낮추고 작게 만드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하면 존경을 표하는 동작이지만, 억지로 하면 최대의 굴욕이자 수치다.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의 관용을 구하기 위해 카노사성(城) 밖에서 무릎을 꿇은 사건은

'카노사의 굴욕'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요즘도 영어·이탈리아어에서 '카노사로 가다'는 표현은 '억지로 굴복하다'는 의미로 통한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무릎 꿇리기도 '갑질'의 사례가 됐다.

한 백화점에서 주차를 둘러싼 시비 끝에 아르바이트생 주차요원이 손님 모녀에게 무릎을 꿇는 일이 있었다.

재작년엔 장애아 부모들이 특수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우리 아이들도 학교 가게 해달라"며

눈물을 흘려 많은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급기야는 정상 외교 행사 과정에서도 무릎 꿇기가 벌어졌다고 한다.

청와대 안보실 김현종 차장이 지난달 유엔총회 당시 외교부 직원을 숙소로 불러 '의전 실수'를 매섭게 질책하자

이 직원이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는 것이다. 김 차장이 비표 문제로 정상회담에 배석하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어제 유엔대표부 국정감사장에서 한 의원이 이 직원에게 경위를 묻기도 했다.

안보실 측에서는 "무릎 꿇린 게 아니라 스스로 꿇은 것"이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김 차장이 정상회담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직원의 큰 실수이지만 무릎을 꿇는 게 있을 수 있느냐는 비판이 나온다.


▶얼마 전 외교장관과 김 차장이 외국 호텔 로비에서 영어로 싸웠다는 게 화제가 됐다.

그때 김 차장은 "제 덕이 부족했다. 앞으로 저 자신을 더욱 낮추고 열심히 하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무릎' 사건이 터졌으니 그 반성이 무색해졌다. 한국 외교 안보는 연일 이런 일이 뉴스다.

'봉숭아 학당'이 따로 없다. 한반도 정세가 출렁이는 엄중한 시기다.

정말 어디 가서 무릎 꿇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