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디자인·건축

[유현준의 도시 이야기] 新年과 대나무

바람아님 2020. 1. 10. 18:28

(조선일보 2020.01.10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시간은 수도파이프에서 흘러가는 물과 같다, 단위 정해서 '오늘부터 2020년'이라고 말할 뿐
대나무는 속이 비어서 바람에 꺾일 수 있지만 마디들이 받쳐줘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구조체
12월 31일과 1월 1일 사이에 끼워 넣은 '年度'는 대나무 마디처럼 더 높이 가기 위한 보조 장치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2020년 새해가 밝았다.

우리는 지구가 스스로 한 바퀴 도는 자전의 시간을 '하루'라고 부르고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인 365일을 '한 해'라고 한다.

인류 초기에 나일강 하구에 살던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홍수가 나는 나일강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홍수 시기를 예측해야만 했다. 멀리 있는 강의 상류에서 비가 오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별자리의 위치 변화를 관측하면서 홍수 시기를 예측했다. 시간 개념의 시작이다.

이렇게 시작한 시간의 개념은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그 단위가 세분됐다.

자연의 변화를 더욱 세밀하고 정확하게 관측하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는 시간의 단위가 필요했다.

이를 가능하게 해준 사람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 '갈릴레오'다.

그는 자연에서 같은 높이에서 떨어지는 것은 무겁거나 가볍거나 질량에 상관없이 떨어지는 시간이 같다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 원리를 적용해서 추의 진자 운동을 이용한 시계가 만들어졌다.

시계를 통해서 인간은 시간을 더욱 세밀하게 나누어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은 사실 단위가 따로 없다


산업혁명 시대에 와서는 초와 분 단위까지 나누어서 정확하게 일상생활에 적용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었다.

기차는 낮 12시 정각에 출발했고 공장은 오전 9시까지 출근해야 하는 시대가 열렸다.

지구 상의 서로 다른 경도에 사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시간에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본다.

도쿄 사람들은 서울 사람보다 52분 먼저 해가 뜨는 것을 보고 52분 먼저 해가 지는 것을 본다.

하지만 우리는 편의상 서울과 도쿄를 같은 시간대에 두고 '시간을 맞추어서' 생활한다.

우리는 지금 자연의 시간을 인간의 단위에 맞추어서 재단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서 시간이라는 것이 원래 단위가 있는 것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김하경


하지만 시간은 사실 단위가 따로 없다.

 빅뱅과 함께 시작된 시간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른다고 알고 있다.

뉴턴은 시간과 공간을 분리된 개념으로 생각하였고, 200년이 지난 후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하나로 연결된

시공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아인슈타인은 빠르게 움직이거나 중력이 센 공간에 있는 존재에게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현대물리학에서는 시공간은 아주 작은 구조로 짜인 망과 같은 것이며 우리가 가진 상식적인 개념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우리의 경험상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대로 흘러간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과거가 현재보다 먼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우리의 의식이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인지는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생명이 태어나서 자라고 쇠퇴하고 죽는 사건은 시간의 흐름과 같이 진행된다는 정도의 경험뿐이다.

그 경험에 근거해서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말한다.

시간은 마치 수도관 속에서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물 같다.

흐르는 물을 칼로 자르는 것처럼 나눌 수 없듯이 시간 역시 나눌 수 없다.

그저 우리가 그 시간에 단위를 정해놓고 어제까지가 2019년이고 오늘부터는 2020년이라고 말할 뿐이다.


대나무가 강한 것은 '마디' 덕분


나무 중에 대나무는 파이프처럼 속이 비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인 나무의 줄기는 잎의 광합성을 통해서 만들어진 영양소를 운반하는 체관과 뿌리에서 빨아들인 수분을 위로

올리는 물관과 이를 구조적으로 안정화하는 세포들로 꽉 차 있다.

그래야 많은 나뭇가지를 지탱할 수도 있고 바람에 꺾이지 않는 강도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속이 꽉 차고 단단한 나무줄기를 건물을 짓는 재료로 사용한다.

그런데 대나무는 다르다. 대나무는 일반적인 나무와는 달리 수도관처럼 주변부만 구조가 있고 속은 비어 있다.

이는 최소한 양의 세포로 더 높고 긴 나무를 만들기에 가장 효과적인 구조다.

하지만 이렇게 속이 비어 있는 대나무의 구조체는 바람에 꺾일 위험이 있다.

우리가 빨대를 쉽게 꺾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나무는 꺾이는 위험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 '마디'를 가지고 있다.

대나무는 파이프처럼 속이 비어 있지만 중간중간에 원판 형태로 된 마디가 속을 받쳐주고 있다.

이 덕분에 대나무는 바람에 눌려서 찌그러지는 것에 더 큰 저항을 할 수 있게 된다.

중간중간을 나눠주는 마디 덕분에 같은 양의 재료로 효과적으로 더 높이 더 멀리 올라갈 수 있는 구조체가 되었다.


동물이나 자연에 계절의 변화는 생존과 직결된 온도나 강수량의 변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연도가 바뀌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직 인간만이 새해 달력을 준비하고 새해를 시작하고 새해의 복을 비는 인사를 한다.

연도라는 것을 만들어서 12월 31일과 1월 1일 사이에 대나무 마디 같은 디스크를 하나 끼워 넣은 것이다.

이런 장치는 우리가 효과적으로 더 멀리 더 높게 가기 위한 보조 장치 같은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2020년에도 한 마디를 힘차게 올려서 더 높이 올라가시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