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세섭 ‘유압도’ 비단에 먹, 119.5×47.8cm, 국립중앙박물관 |
해한테 선물받은 그 냄새가 좋아 한낮 땡볕에 집 근처 냇가에 나갔다. 햇볕 속에서 내 몸을 말리면 장마철 습기처럼 눅눅했던 마음이 증발되고 새물내가 날까? 끝없이 내리붓는 폭우 때문에 산책로까지 잠겨 발길을 끊었더니 그동안 텁텁한 물속은 말끔히 닦여 있었다. 깊은 산속 계곡물이 연상되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서 있는 수초들의 표정도 생기가 넘친다. 너무 웃자란 풀들은 여지없이 꺾여 바닥에 누워 있다. 천방지축 날뛰던 사람이 삶의 고초를 겪어보고 나서 세상 무서운 줄 알고 겸손해지는 모습 같다. 자연이라는 경전(經典)은 은유법이 아니라 직설법이다. 빙빙 에둘러 표현하는 법이 없이 살아있는 언어로 가득한 직설법이다. 그 직설법의 한가운데에서 오리 두 마리가 다정하게 헤엄을 치고 있다.
암수 서로 다정한 오리
햇볕도 물속에 들어가 멱을 감고 싶은 한낮. 홍세섭(洪世燮·1832~1884)의 ‘유압도(遊鴨圖)’ 속에서 두 마리 오리가 헤엄치고 있다. 오리 한 마리가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자 또 한 마리가 그 뒤를 따른다. 오리는 유독 암수가 다정한 새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두 마리 오리는 서로 눈빛을 마주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오리의 발짓으로 물에 파장이 일자 한낮의 고요가 뒤로 밀린다. 포물선을 그으며 뒤로 밀리는 물결은 부감법(俯瞰法·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리는 방법)에 의해 더욱 현장감이 생생하다. 외곽선을 생략하고 연한 먹과 진한 먹을 배합해서 그린 오리의 모습도 신선하거니와 물 위에 툭툭 떨어뜨린 듯한 진한 먹과 수초의 표현은 대담하면서도 청신하다. 작가 석창(石窓) 홍세섭은 당상관을 지낸 선비화가로 ‘유압도’ ‘야압도’ 같은 풋풋한 영모화(翎毛畵·새와 동물을 소재로 한 그림)를 여러 점 남겼다.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감각의 작품을 그려 19세기 이색적인 화풍의 대표화가가 되었다. 홍세섭은 붓 끝에 생기를 달고 사는 사람인가? 냇물에 붓을 빨면서 독하고 매운 분노까지 씻어낸 듯 붓질이 청아하다. 홍세섭은 물과 수초가 어우러진 자연의 풀향기를 붓끝에 적셔 거리낌없이 사방에 흩뿌리고 있다. 오리가 발짓을 할 때마다 싱싱함이 퍼덕거린다. 오리가 일으킨 파문은 감상자의 마음에서 쉽게 잦아들지 못한다. 혼탁한 세상에서 허우적거리다 온 사람이라면 대번에 둔사적(遁思的) 본능이 꿈틀거릴 것이다. 개결(介潔)한 선비의 풍모와 그윽한 시정(詩情)이 담겨 있는 작품 앞에서 감상자는 세상에서 강조하는 처세술이나 욕망의 덧없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의 작품은 말한다. 냇가에 오려거든 무엇인가를 붙잡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살았던 조바심을 내려놓으라고. 더 빨리, 더 많이 이루기 위해 휘청휘청 살아온 시간도 잠시 내려놓고 그저 시원한 냇가에 풍덩 빠지라고 권한다. 마음을 짓누르던 시름일랑 잊어버리고 오리가 들려주는 냇가의 청신한 내력에 귀 기울여 보라고 얘기한다. 이런 물속에 맨발을 담근 채 한나절 첨벙거리고 나면 가뭄에 시들어가듯 팍팍했던 삶이 전율하듯 벌떡이는 에너지로 채워질 것이다. 먼지 쌓인 삶은 말끔히 헹궈질 것이고 자연이 주는 깊은 위로는 심장까지 젖어들 것이다. 뒤틀린 심기는 편안해질 테고 자글자글 끓던 불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때 나그네는 삶에 대한 외경(畏敬)을 맛보리라. 마지못해 적선하듯 툭툭 내뱉던 언어 속에도 정감이 담기리라. 엉켜 있던 생각의 실타래는 가지런해질 것이고, 삶에 대해 성실해야겠다는 당위성을 얻으리라. 대 그림자가 계단을 쓸어도 티끌 하나 쓸려나가지 않고, 달빛이 호수를 뚫고 들어가도 물에는 흔적이 남지 않듯 나그네의 마음밭도 평온해지리라.
홍세섭은 오리 그림뿐만 아니라 산수화도 잘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알려진 유작은 대부분이 영모화이다. 그의 아버지 홍병희(洪秉僖)도 그림을 잘 그려 부자가 때로 합작(合作)을 했다고 전해진다.
금실 좋은 오리가 장원급제 도와 줘
오리는 선비화가나 화원화가들이 그린 감상용 그림 외에도 민화에 자주 등장한다. 오리는 암컷과 수컷의 사이가 좋아 부부간의 금실을 기원하는 그림을 선물하려고 할 때 언제나 그림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다. 오리는 대표적인 물새다. 오리가 서식하는 곳은 거기에 물이 있다는 뜻이다. 농경 민족에게 물은 생존이 걸린 문제다. 오리가 풍요를 기원하는 솟대의 장대 끝에 모셔지게 된 것은 물을 부를 수 있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오리는 복을 불러오는 상서로운 길조(吉鳥)다. 그러나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흔한 새라서 그다지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다. ‘낙동강 오리알 같다’는 표현도 낙동강에 오리알이 무수히 많았기 때문에 생겨났다. 인간의 소망을 천상의 신에게 전해주는 신성한 중재자인 오리가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음을 의미한다. 단지 흔하다는 이유만으로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 어디 오리뿐이랴.
오리는 부부 금실과 물이 필요한 곳에서만 불러 주는 새가 아니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에게도 인기 만점인 매력적인 새다. 오리 압(鴨)자를 파자(破字)하면 甲과 鳥로 되어 있다. 甲은 1등 혹은 A학점을 의미한다. 그러니 과거에 장원급제하는 새를 상징한다. 오리가 두 마리 있으면 이갑(二甲), 즉 향시(鄕試)와 전시(殿試)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함을 의미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선비 방에 오리 그림이 여러 점 붙어있다 한들 전혀 뜬금없는 짓이 아니다. 합격에 대한 강렬한 소원을 드러낸 것이다.
연꽃에 오리 두 마리가 그려지는 그림도 있다. 연꽃의 연밥을 뜻하는 연과(蓮顆)는 잇달아 합격함을 의미하는 연과(連科)와 발음이 똑같다. 그러니 연꽃에 오리 두 마리를 합하면 ‘연과이갑(連科二甲)’, 즉 연속해서 두 군데 시험에 장원을 하라는 뜻이 된다. 과거시험에서 장원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벼슬하고자 하는 바람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이런 식의 그림이 무수히 많이 그려졌을까, 측은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대학 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날이면 수험생 부모가 학교 대문에 엿을 붙이고 빌고 있는 모습도 근원을 추적하다 보면 이런 오랜 역사와 전통의 맥락 속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길조이거나 절름발이 오리이거나
홍세섭이 ‘유압도’를 그릴 때 마음속에 어떤 의도를 품고 그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부부간의 금실을 도모함인지, 장원을 기원한 것인지도 알쏭달쏭하다. ‘특별한 사명’을 띠고 그린 그림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감상화로서의 독창성과 예술성이 과할 정도로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아름답다. 한여름 냇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경이로운 생명체에 대한 찬탄이 담겨 있다. 그가 그린 그림 속의 오리는 아무리 가볍게 행동해도 절대로 레임덕(lame duck·절름발이 오리)의 비참함은 맛보지 않을 것 같다. 물속에 들어갈 때도 아름답고 물 밖으로 나올 때도 기품 있다. 모름지기 사람도 오리처럼 한결같다면 어느 자리에 있든 결코 손가락질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리의 깃털에서도 새물내가 난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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