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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가 말을 걸다]연꽃은 피었는데 풍류에 빠진 양반들, 그대들은 君子인가-신윤복 ‘연당야유도’

바람아님 2014. 2. 2. 17:34
▲ 신윤복 ‘연당야유도’종이에 색, 28.2×35.2㎝, 간송미술관

    그해 여름을 잊을 수가 없다. 마흔을 갓 넘길 때였다. 8월의 햇볕이 타들어가던 시절에 낙동강 하류의 남지철교가 보이는 작은 모텔에서 열흘을 보냈다.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결심으로 찾아간 동네였다. 물도 설고 낯도 선 동네에서 나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모텔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도시를 벗어나니 시간은 천천히 흘렀고 꿈은 번거롭지 않았다. 뙤약볕이 쏟아지는 한낮에는 주로 방안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러다 지치면 근처에 있는 절에 가서 좌선을 하거나 하릴없이 철로를 걸어 다녔다. 모텔은 논 가운데 덩그마니 세워져 있었다. 앞 도로를 제외하고는 주변에 건물이 전혀 없었다. 모텔 바로 뒤쪽에는 자그마한 산을 배경으로 연방죽이 있었는데 아침마다 매미가 숨넘어가는 소리로 울어 젖혔다. 떼를 쓰듯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좇아 창문을 열면 매미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우산처럼 널찍한 연잎 속에서 이 세상 꽃이 아닌 듯 기품 있고 우아한 연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출렁이는 물에 씻겼으나 요염하지 않은’ 바로 그 꽃, 군자의 꽃이었다.
   
   
   가야금 소리 들으며 연꽃을 감상하다
   
   여기가 어디일까. 정갈하게 석축을 쌓고 담장을 두른 걸 보니 어느 대갓집 후원이다. 연못에는 시퍼런 연잎 사이로 붉은 연꽃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개인 집 후원에 연못을 만들 정도라면 집주인은 그 위세가 아주 당당한 정승급이거나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역관(譯官)이다. 도포에 두른 붉은색과 자주색 띠를 보니 역관 같은 중인(中人)은 아닌 것 같다. 이런 복장은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당상관 이상만이 할 수 있다.(당하관 이하는 파란색 띠를, 벼슬이 없는 백면서생은 검은색 띠를 두른다.) 권력에 재력까지 갖춘 것인가. 백성의 심부름꾼이라는 공무원이 쥐꼬리만한 박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화려한 저택에서 여름 한낮의 넉넉함을 즐기고 있다. 이런 사람은 필시 아버지가 부자거나 자신의 권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이권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느 쪽이든 남들보다 여유롭게 즐기며 사는 것을 그들은 풍류(風流)라고 생각한다.
   
    고급 관료들이 노는 모습 한번 감상해 보자. 장마도 끝나고 연못 속의 연꽃들이 경쟁적으로 꽃대를 들어 올리던 8월 어느 날, 세 남자가 후원에서 만났다. 모처럼 하늘도 맑게 단장하고 서늘한 바람을 흘려보내는데 분위기 띄워 줄 가야금 소리가 빠질 수야 없는 법. 아리따운 기생들이 짝을 맞춰 동석했다. 소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 깔고 앉아 가야금 소리 울려 퍼지니 이보다 더 좋은 풍류가 없으렸다. 여자를 대하는 사내들의 태도가 사뭇 다르다. 한 남자는 모임의 취지에 충실하게 장죽을 물고 앉아 가야금 소리를 감상하고 있다. 뒤로 빠진 남자는 방건까지 내던지고 무릎에 앉힌 기생을 주무르기에 여념이 없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했던가. 서 있는 남자는 자기 짝 대신 다른 남자의 여자를 보고 있다. 이에 화가 난 버림받은 여자는 애꿎은 담배만 뻐끔거린다.
   
   ‘청금상련(聽琴賞蓮)’은 기생과 한량들을 많이 그린 신윤복(1758~?)의 대표작이다. 작품 제목은 가야금 소리 들으며 연꽃을 구경하다란 뜻으로 ‘청금상련’이라 부르기도 하고, 연꽃 핀 연못에서의 유희라는 뜻으로 ‘연당야유(蓮塘野遊)’라 부르기도 한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림 속에 담긴 작가의 풍자와 해학이 통렬하다. 곧 죽어도 공자 왈 맹자 왈을 들먹이며 체통을 중시하던 양반들이, 가려진 장소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양반 관료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폭로한 작품이다.
   
   그런데 폭로하는 자세가 전혀 전투적이거나 시니컬하지 않다. 그의 붓끝이 얼마나 교묘하던지 폭로의 현장에 있던 양반이나 현장을 목격한 감상자 모두 그림을 즐기느라 바빠 본질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럼에도 신윤복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연못 속에 연꽃을 그려 넣음으로써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를 잊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내 이럴 줄 왜 몰랐던가
   
    연꽃을 무척 사랑했던 주돈이(1017~ 1073·중국 북송의 유학자)는 ‘애련설(愛蓮說)’을 지어 연꽃을 ‘군자(君子)의 꽃’으로 치켜세웠다. 그 뒤부터 연꽃은 고결하게 살고 싶어하는 선비의 상징이 되었다. ‘군자’는 ‘높은 인격을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 고결하고 높은 인격을 상징하는 연꽃은 피었는데 당신들은 군자인가? 그림 속 연꽃이 세 남자를 향해 그렇게 일갈하는 것 같다.
   
   민요 중에 ‘진주난봉가’가 있다. 요약하면 이러하다. 진주에 사는 꽃다운 처녀가 ‘울도 담도 없는’ 가난한 집에 시집을 간다. 서럽고 서러운 시집살이가 3년쯤 지난 어느 날, 시어머니가 아들이 온다면서 며느리한테 진주 남강에 빨래를 하러 가란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그동안 젊은 부부가 떨어져 살았던 모양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창 빨래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난데없는 말굽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 힐끗 보니 ‘하늘 같은 갓을 쓰고 구름 같은 말을 탄’ 낭군님이다.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서려는데 그는 ‘못 본 듯이 지나간다’. 서러웠지만 흰 빨래는 희게 하고 검은 빨래는 검게 빨아 집이라고 돌아와 보니 사랑방이 시끌벅적하다. 그러지 않아도 서러운데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가관이다. 네 낭군이 지금 사랑방에 와 있으니 어서 가서 인사드리고 오너라. 서러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마음으로 사랑방에 건너가 보니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낭군님이 앉아 있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술상을 차려놓고 기생첩을 옆에 끼고서 권주가를 부르는 중이었다. 이것을 본 며느리는 아랫방으로 물러나와 아홉 가지 약을 먹고 목매달아 죽어버린다. 격정적인 성정을 지녔던 것 같다. 아님, 그동안 낭군님을 목숨처럼 그리워했든지. 그 말을 들은 진주 낭군은 깜짝 놀라 버선발로 뛰어나와 통곡하며 이렇게 울부짖는다.
   
   ‘화류계 정은 삼 년이고 본댁 정은 백 년인데 내 이럴 줄 왜 몰랐던가. 사랑 사랑 내 사랑아. 어화둥둥 내 사랑아. 너는 죽어 꽃이 되고 나는 죽어 나비 되어 푸른 청산 찾아가서 천년만년 살고 지고. 어화둥둥 내 사랑아! 어화둥둥 내 사랑아!’
   
   남자가 자기 배우자가 아닌 여자와 스캔들이 있으면 로맨스이고 풍류인가. 나이 들어도 여전히 자신의 젊음이 건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인가. 혹은 철없을 때 몰랐던 사랑을 철들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진짜 사랑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그냥 인생이 무료해서 생의 활력소가 필요한 건가. 어느 경우든 상관없다. 사랑이든 바람기든 당사자야 행복하면 그만이지만 때론 그 행복이 배우자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진주 낭군은 백 년이나 되는 본댁 정에 비해 삼 년밖에 되지 않은 화류계 정이 짧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삼 년이 삼백 년이 될 수도 있다. 남자는 안정적인 가정은 유지한 채 어여쁜 기생이 뜯는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권주가를 부르는 것이 풍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멋들어진 풍류가 누군가에게는 풀뿌리까지 사정없이 뽑아버리는 세찬 바람일 수 있다. 신윤복이 ‘청금상련’에 그려 넣은 군자의 꽃이 그걸 얘기해 주려는 것은 아닐까.
   
   
   장난으로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는 죽는다
   
   세월이 흘러 주름주름 늙어지게 되면 사랑 때문에 상처받는 것이 별거 아니란 걸 알게 된다. 풍류가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냥 흘러 지나가는 바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까짓 것이 입에 거품 물고 따져야 할 만큼 심각한 문제도 아니고 목숨을 걸 만큼 절박한 사건은 더더욱 아니란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젊었을 때야 어디 그러랴. 장난으로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맞아 죽듯 사소한 것 때문에 목숨이 왔다갔다 할 때가 젊음 아닌가.
   
   모텔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연꽃만 쳐다보면서 매미처럼 비명만 지르던 때의 번민도 지나놓고 나니 별거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이 지나 더 이상 싸우는 것도 시시해지는 나이가 되면 아무리 세찬 바람도 찻잔 속의 태풍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지점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견뎌야 한단 말인가.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을 피우기까지 어떻게 뜨거운 여름을 버틸 수 있단 말인가.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