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아트칼럼

[그림이 있는 아침] 춤추는 성당

바람아님 2014. 2. 1. 21:18

로베르 들로네의 ‘라옹 대성당의 탑’(1912년, 개인소장)


프랑스 북부의 소도시 라옹에는 고딕 양식의 거대한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성당은 다른 곳과는 달리 실내에 밝은 흰색의

돌을 사용해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자랑한다. 그러나 이 점은 경건한 종교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마을 사람들은 툭하면 이곳에 모여 공연을 펼치고 수다를 떨었다. 성당이 아니라 공회당이나 마찬가지였다.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로 분류되는 프랑스 화가 로베르 들로네(1885~1941)의 ‘라옹 대성당의 탑’은 마치 그런 들뜬 분위기를 포착한 것 같다. 입체파는 대상을 분해해 재구성하려 한 20세기 초의 미술운동인데 피카소가 좀 더 형태에 관심을 둔 데 비해 들로네는 밝고 화려한 색채 효과를 탐색했다. 소설가 위스망스는 ‘영혼이 빠진 성당’이라고 했지만 들로네는 성당에 활기찬 영혼을 불어넣은 것 같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로베르 들로네의 작품세계]

 

 

로베르 들로네 [붉은색 에펠탑] 1911-1912
캔버스에 유채 ㅣ 125×90.3cm ㅣ 구겐하임 미술관

 

 

1889년은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적인 국제만국박람회가 열린 해이다.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에는 이 만국박람회를 구경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오늘날 국제엑스포나 국제전시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이미 서구와 교류하고 있던 일본은 만국박람회에 참여하여 서구의 선진기술 등을 수용했다.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은 1889년 만국박람회에 맞추어 지어졌다. 이는 파리의 상징을 벗어나 서구, 아니 세계 전체에 프랑스의 문화적 우월성을 선언하는 예술 조형물이었다.

 

프랑스는 계몽주의 이후 아프리카의 알제리나 폴리네시아 등을 식민지화하면서 동시에 만국박람회라는 국제전을 개최하였다. 이런 국제전시와 1889년 세워진 에펠탑은 프랑스의 국가적 이미지와 위상을 대외적으로 선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889년 만국박람회는 서구의 ‘문화’, ‘문명’ 등을 알려주는 기계관, 과학관 등이 프랑스와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전시되고, 대신 아프리카, 폴리네시아, 동남아시아 파빌리온은 대조적으로 그들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원시 주거지’가 ‘전시’되었다. 이 전시는 이들 나라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아야할 만큼 비문화적이라는 사실을 정당화시켰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라는 말처럼 백번의 말보다 한번 본다는 것, 그것은 1889년 만국박람회장에서 통했다.

 

에펠탑 건축 & 만국박람회 준비 장면, 1889년
L'exposition de Paris

만국박람회에 재현된 카이로 거리 풍경, 1889년
L'exposition de Paris

만국박람회에서 불 밝힌 에펠탑
판화, 52×34cm, 오르세 미술관

 

 

만국박람회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1980년대가 되면서 이뤄졌다. 주변인에 지나지 않던 제 3세계 학자들이나 미술가들의 비판을 통해 서구가 주도한 19세기, 20세기 초반에 대거 등장한 만국박람회는 재고되었다. 특히 1889년 만국박람회장에는 야만인들이 실제로 자신의 국가관(파빌리온, pavilion)에서 생활하였다. 그들의 몸은 전시되고, 눈요기가 되었다. 그들은 19세기 초반에 엉덩이가 크다는 이유로 인종적 차별을 받고 서구의 관점에서 보면 비정상적인 신체구조 때문에 자신의 몸이 ‘전시’되고 ‘연구 대상’이 되었던 ‘호텐토트의 비너스(The Hottentot Venus)’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시에 제작된 전시가이드나 전시자료를 보면, 이집트 퍼빌리온 전시실에는 이집트인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삽화 이미지를 볼 수 있다. 폴 고갱(Paul Gauguin)이 타히티를 꿈꾼 것도 이곳 만국박람회장에서의 이국적인 체험 때문이었다.

 

 

발전하는 테크놀로지 – 스피드, 역동성에 대한 찬가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프랑스 정부의 주도면밀한 전시 이데올로기를 떠나 ‘파리의 발전,’ ‘에펠탑’에 열광했다. 당시 파리 시민들만 ‘에펠탑’에 열광한 것이 아니라 1889년에 파리를 휩쓴 후기 인상주의나 신인상주의자들의 그림에는 ‘에펠탑’을 앞으로 도래할 20세기의 상징이자 희망으로 해석했다. 이러한 문화적 낙관주의인 ‘아름다운 시대(La Belle Époque)’는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한풀 꺾이게 되었지만, 에펠탑은 프랑스 문명의 승리이자 서구 테크놀로지의 승리였고, 내성적인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도 열광하였다.

 

에펠탑이 상징하는 테크놀로지의 승리와 기계주의 미학은 20세기 초반에 들어 파리에 근거지를 둔 이탈리아 출신의 작가들이 형성한 미래주의(Futurism)나 오르피즘(Orphism)을 중심으로 재해석되었다. 오르피즘은 1912년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가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의 서정적이면서도 미래적인 그림을 보고 처음으로 사용된 비평 용어이다. 본래 이 용어는 그리스의 시인이자 음악가였던 오르페우스(Orpheus)의 이름에서 나왔으며, 들로네뿐 아니라 들로네의 부인이었던 소니아 터크 들로네(Sonia Terk Delaunay), 프란티스 쿠프카(František Kupka)의 작품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들은 입체파의 파편화된 조형요소와 미래파의 동적인 요소, 그리고 화려한 색채를 감각적으로 구사하여 1910년대와 192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

 

조르주 쇠라 [에펠탑] 1889년
캔버스에 유채, 15.2×24cm, 샌 프란시스코 미술관

로베르 들로네 [생-세르냉 3번] 1909–1910년
캔버스에 유채, 114.1×88.6cm, 구겐하임 미술관

 

 

오르피즘이 입체파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오르피즘이란 용어대신 ‘오르픽 큐비즘(Orphic Cubism)'이란 용어가 사용되기도 하지만, 로베르 들로네는 피카소와 브라크가 색채를 억제했던 것과는 달리 화려한 색채를 구사하며 원형을 선호하였고, 19세기 말 프랑스의 쇠브뢸(Michel-Eugène Chevreul)이 발전시켰던 보색의 색채 대비법에 의존하였다. 쇠브뢸의 색채대비법은 19세기 초반 외젠 들라크르와(Eugène Delacroix)와 19세기 후반 쇠라의 색채론에도 영향을 준 바 있다.

 

오르피즘은 로베르 들로네가 제작한 에펠탑 연작에서 가장 잘 표현되었지만 그가 1912년 이전에 제작한 작품은 후기인상주의자 세잔(Paul Cézanne)과 큐비즘의 영향에서 오르피즘으로 이행하는 ‘과도기’를 잘 보여준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고딕성당인 [셍 세르냉 3번(Saint-Séverin No. 3)](1909–10)은 고딕성당 특유의 궁륭(vault)의 골격과 구조에 집중하여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빛이 섬세하게 스며드는 장면을 표현한다. 들로네에게 색채는 바로 빛이었고, 빛은 프리즘 효과를 보여주는 색채로 처리되었다.

 

들로네는 피카소와 브라크의 분석적 큐비즘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무채색의 어두운 느낌을 강조했다. 특히 세르낭 성당 작품에서는 고딕 건축의 선이 움직이는 것처럼 동적인 운동감을 표현했다. 또한 들로네는 관람자의 눈이 중앙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그림 밖으로 무한하게 빠지지 않도록 그림의 중앙에 화면을 분할하듯 그려 넣었다. 고딕 아치는 성당의 천정에서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성당 바닥에서도 시각적으로 솟아 오르는 환영을 전달한다.

 

 

파리의 역동성을 표현하는 들로네의 오르피즘

들로네의 오르피즘은 큐비즘과 미래주의를 절충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에펠탑은 피카소나 브라크, 미래주의자들의 작품에서 느낄 수 없는 파리의 역동성과 현대적인 느낌을 가장 잘 보여준다. 특히 에펠탑을 여러 각도에서 그리면서도 에펠탑 주변의 건물을 함께 표현하여 들로네는 변화하는 파리의 풍경과 테크놀로지의 승리, 문명의 진보 등 파리의 현대성(modernity)을 시각적으로 표상하였다. 파리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자 철제로 만들어진 에펠탑은 고대의 아치, 오벨리스크, 수직의 원주 이상으로 모뉴멘털한 기념비였다.

 

들로네는 1909년 소니아와 약혼을 한 기념으로 처음으로 에펠탑을 그리면서 연작을 시작했으며 총 30여 점의 연작이 존재하고, 이후 추상으로 작품 성향이 완전히 바뀌면서 에펠탑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는 실제로 에펠탑 근처의 창문에서 본 에펠탑을 좋아하였고 [연속적인 창문(Simultaneous Windows)] 연작에서도 창문이나 창문에서 본 도심을 자주 표현하였다. 19세기 말 상징주의 화가들에게 창문은 마음의 내적 비전에 다다르게 해주는 중요 모티프이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들로네는 보색대비법을 실험하여 보색관계를 보여주는 색채가 우리의 눈에서 어떻게 인지되는지에 관심을 두었다. 보색대비는 반대의 색상을 병치하지만, 눈의 인지 작용을 통해 조화로운 색채구성이 구축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쇠라의 [에펠탑]도 이러한 보색대비를 보여주지만, 도시 풍경이나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재하는 정적인 느낌을 강조했다.

 

[나무와 에펠탑] 1910년
캔버스에 유채, 126.4×92.8cm, 구겐하임 미술관

[샹 드 마르스 : 붉은 탑] 1911년
캔버스에 유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필립 수포 초상 연구] 1922년
종이에 목탄, 수채, 194.9×129.9cm

 

 

1910년 여름에 완성된 [나무와 에펠탑(Eiffel Tower with Trees)]에서 들로네는 역동성에 주안점을 두어 자신의 양식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특히 입체파에서 구현된 다시점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시점에서 본 에펠탑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그렸으며, 다양한 공간과 시간대에서 본 에펠탑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고자 애썼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때문에 공존할 없는 다양한 관점들을 한 화폭에 넣어 관람자들이 이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이는 단순한 형식적 관점이 아니라 들로네에게는 심리적인 인식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특히 [나무와 에펠탑]은 파리에서 직접 에펠탑을 보고 제작된 것이 아니라 기억에 바탕을 두고 제작된 작품이다.

 

1911년에 제작된 두 점의 [붉은 탑(The Red Tower)]은 에펠탑 사이로 보이는 뭉게구름과 건물 사이사이로 움직이는 에펠탑을 보여준다. [샹 드 마르스: 붉은 탑(Champs de mars: The Red Tower)]은 전경의 건물과 화면 좌우에 반쯤 보이는 높은 건물 사이로 보이는 에펠탑을 보여준다. 들로네는 에펠탑 근처에 있는 건물과 풍경, 나무 등을 중심으로 관람자의 눈이 여기저기로 부산하게 이동하게 만들어 건물과 풍경, 에펠탑이 서로 혼연일체가 되어 춤을 추는 느낌을 준다. 특히, [에펠탑] 연작은 세잔의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견고하고 구축적인 느낌대신 흩어져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스피드가 현대 도시를 포착한다. 파편화된 건물과 에펠탑은 영원함이 사라진 현대성의 표현이자, 시시각각 변화하는 단편적인 일상생활을 의미한다. 들로네의 현대 도시 풍경은 칼 마르크스의 말대로 견고한 모든 것은 공기 속으로 녹아버리고 사라져버린 모습을 시각화하는 듯하다.

 

 

색채와 빛의 에너지 – 추상적 실험

1911년 들로네는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초대로 ‘청기사파(The Blue Rider)’ 그룹에 합류하면서 점차 추상에 다다른다.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동시적인 대조: 태양과 달(Simultaneous Contrasts: Sun and Moon)](1912-13)에서 태양과 달을 동시에 원형 캔버스에 담으며 구상을 점차 제거해갔다. [연속적인 창문(Simultaneous Windows (2nd Motif, 1st Part))에서 에펠탑은 구상의 형태를 띠며 이 작품 이후로 들로네는 완전 추상에 다다른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들로네는 점차 색채와 빛을 통해 전달되는 에너지와 빛의 비물질성(immateriality)을 더욱 강조하며 빛이야 말로 이 세상의 유일한 ‘리얼리티’라고 믿었다.

 

[동시적인 대조: 태양과 달] 1912-1913년
캔버스에 유채, 뉴욕현대미술관

[연속적인 창문] 1912년
캔버스에 유채,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들로네는 스페인에 머물며 계속 작업을 했으며 마드리드에서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를 만나 ‘클레오파트라(Cleopatra)’ 무대를 디자인했고, 소니아는 코스튬 디자인을 도맡았다. 로베르 들로네가 1921년 파리로 돌아와 맡은 제일 중요한 작업은 1937년 월드 페어의 파빌리온 중 하나였던 기차와 항공 여행 섹션에서 선보인 작업이었다. 그들의 작품에서는 동적인 요소 때문에 미래지향적이면서도 시적인 운율과 박진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1920년대만 하더라도 로베르 들로네가 소니아 들로네보다 더 유명했지만, 소니아의 경우 패션과 디자인, 회화와 디자인 영역을 아우르는 과감한 시도 때문에 현재는 오히려 소니아 들로네를 조명하는 전시나 카탈로그 등이 더욱 많은 편이다. 또한 남편보다 훨씬 오래 살면서 작업 양도 방대했기 때문에 양적인 면에서도 로베르 들로네보다 미술관 컬렉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러시아 출신의 유태인이었던 소니아는 독일군을 피해 끊임없이 피신을 다녔으며, 그녀가 디자인한 패션이나 직물 등은 색채와 조형적인 형식면에서 현대적인 감각을 잘 표현해준다. 이들 부부는 양차대전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도 예술이 일상 생활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으며, 일상과 예술의 경계가 없는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이었다.

 

 

 

 

 

정연심 /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홍익대학교 영어교육과에서 학부를 마치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 1995년에 도미하며 뉴욕대학교 예술행정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005년 뉴욕대학교 Institute of Fine Arts에서 미술사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뉴욕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조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