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아트칼럼

정경원의 디자인노트 [12] 9·11 테러의 상처를 어루만진 '재능 기부 디자인'

바람아님 2014. 2. 4. 10:43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뉴욕을 사랑한다’로고… 밀턴 글레이저, 데일리뉴스 2001년 9월 19일자에 실린 포스터.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뉴욕을 사랑한다’로고… 

밀턴 글레이저, 데일리뉴스 2001년 9월 19일자에 실린 포스터.



'I ♥ NY'만큼 뉴욕을 잘 나타내는 상징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이 로고가 인쇄된 흰색 셔츠를 뉴욕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지만, 정작 뉴욕주나 뉴욕시의 공식 로고는 아니다.

미국 뉴욕주 상무국의 의뢰로 그래픽 디자이너 밀턴 글레이저(Milton Glaser· 83)가 1977년에 디자인한 이 로고는 단지 몇 달 동안 진행되는 관광 진흥 캠페인에 사용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 로고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져서 요즘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문제는 미국의 다른 도시들은 물론 외국에서조차 무단으로 'I ♥××'라 표기된 짝퉁 로고를 사용하는 사례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뉴욕이 보유한 이 로고의 상표권을 침해한 모방자들과 벌이는 법적 분쟁이 무려 3000건이 넘는다.

이처럼 유명해진 이 로고의 디자인료와 저작권료는 얼마나 될까? 만일 원작자인 글레이저가 지적재산권을 행사한다면 그 액수가 엄청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디자인료를 받지 않았으며, 모든 지적재산권을 뉴욕주에 기탁하여 일찌감치 '재능 기부'를 실천했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시가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의 무자비한 테러로 큰 상처를 입고 시민들이 비탄에 빠졌을 때 글레이저는 자발적으로 새로운 로고를 디자인했다. 기존 로고에 '어느 때보다 더(MORE THAN EVER)'를 추가하고, 맨해튼 섬을 상징하는 하트의 서남쪽, 즉 세계무역센터 부지에 해당되는 곳에 검은색으로 멍을 표시하여 참혹한 테러의 상처를 부각시켰다.

데일리뉴스 신문에 게재된 이 포스터는 비록 큰 멍이 들었을지라도 더 뉴욕을 사랑한다는 메시지로 뉴욕 시민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고 단결심을 고취시켰다. 훌륭한 로고 디자인은 백 마디 말보다 더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출처-조선일보 2012.06.11 정경원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