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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회화 100선 - 왜 名畵인가 [13] 빈틈없이 그리다… 조국에 대한 그리움

바람아님 2014. 1. 30. 10:37

(출처-조선일보 2014.01.30 최은주 국립현대미술관 학예1팀장)



	한국근현대회화 100선 전시회 로고 이미지

[왜 名畵인가] [13] 배운성의 '가족도'
독일 유학 중이던 80년 전, 후원해준 백씨 一家 모습 담아
 

배운성(裵雲成·1900~1978)은 우리 화단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다. 
그는 1920년대 독일의 레벤훈켄미술대학과 베를린국립미술학교에서 정식 교육을 받은국내 최초의 유럽 미술 유학생이었다. 
이어 그는 베를린과 파리에 거주하며 1927년 파리 살롱 도톤느 입선, 1933년 폴란드 바르샤바 국제미전 1등 상을 수상하며 
그 나름의 명성을 쌓아갔다. 배운성은 1940년 귀국해 홍익대 등에서 학생을 가르치다 6·25 발발 후 월북했다.

상당 기간 잊혔던 그가 다시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1988년 납·월북 작가에 대한 해금 조치 덕분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가 있다. 1990년대 파리에서 공부하던 한 소장가가 그의 작품 48점을 무더기로 사들였다. 
2차대전 와중이던 1940년 귀국하면서 그가 파리 아틀리에에 남겨 두었던 작품 중 일부가 발견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발견으로 한국 근대 미술사 한 부분도 함께 복원됐다. '가족도'는 그때 발견된 그림 중 가장 크면서도 작가의 
화풍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배운성은 이 작품을 1935년 함부르크 민속박물관 개인전에 출품했었다.

 배운성의 1930~1935년작 ‘가족도’, 140×200㎝. /전창곤 소장


대청마루 앞에 모여 있는 17명의 인물은 당시 조선을 대표하던 갑부인 백인기 일가 구성원들과 작가 자신이다. 

맨 왼쪽의 흰색 두루마기를 입고 서양식 밤색 구두를 신은 사람이 배운성. 

백인기가(家)의 집사였던 배운성은 백인기의 후원으로 독일로 유학 가게 됐다. 

외국에서 입신한 배운성은 백씨 일가에 대한 흠모의 정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정성스럽게 그린 이 그림에 담뿍 담아 놓았다. 

당시 이 그림을 보았던 외국인들의 눈에 한국의 집, 한국의 옷, 한국의 풍습을 고스란히 전하는 이 작품은 매우 이국적인 

환상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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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보려면…]

▲3월 30일까지, 월요일은 휴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관람료 성인 6000원(덕수궁 입장료 1000원 포함), 초·중·고생 3000원, www.koreanpainting.kr (02)318-5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