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영, ‘자로문진’ 인물고사도책, 비단에 색, 41.1×33.8cm, 대북 고궁박물원 |
공자의 유랑길은 숱한 위험과 허다한 비난으로 점철됐다. 공자가 자신을 알아 줄 군주를 찾아 이 나라 저 나라의 궁궐 문을 기웃거리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다. 공자 일행이 엽(葉) 땅을 떠나 채(蔡)나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황하를 건널 수 있는 나루터가 어디인지를 몰라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쟁기질하며 밭을 갈고 있는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을 만났다. 공자는 제자 자로를 시켜 그들에게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게 했다.
“저기 수레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신가?”(장저)
“공구(孔丘·孔子)입니다.”(자로)
“노나라의 공구란 말이오?”(장저)
“그렇습니다.”(자로)
“그는 나루터를 알고 있을 것이오.”(장저)
자로가 걸익에게 나루터를 묻자 걸익이 되물었다.
“그대는 누구시오?”(걸익)
“중유(仲由)입니다.”(자로)
“노나라 공구의 제자란 말이오?”(걸익)
“그렇습니다.”(자로)
“도도하게 흐르는 물결처럼 천하는 모두 이렇게 흘러가는 법인데, 누가 그것을 바꾸겠소? 그대 또한 사람을 피해 다니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어찌 세상을 피해 다니는 선비를 따르는 것만 같겠소?”(걸익)
그러면서 밭 가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자로는 돌아와 금방 있었던 일을 공자에게 전했다. 공자는 실망스러운 듯 탄식하며 말했다.
“새나 짐승들과 함께 무리를 이룰 수는 없다. 내가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지 않고 누구와 더불어 산단 말인가? 천하에 도(道)가 있다면 내가 구태여 바꿔놓기 위해 안달하지 않을 것이다.”
논어 ‘미자’ 편에 나오는 얘기다. 같은 내용이 사기 ‘공자세가’에도 보인다. 노나라 애공 4년(기원전 491년) 때의 일이었다. 이 장면은 ‘자로문진(子路問津·자로가 나루터를 묻다)’란 제목으로 ‘공자성적도’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워낙 인기 있는 일화라서 ‘공자성적도’와 상관없이 여러 차례 독립된 화목(畵目)으로 제작됐다. 오늘은 명대(明代)의 구영(仇英·16세기 초엽)이 그린 ‘인물고사도책(人物故事圖冊)’에 담긴 그림을 살펴보겠다. 이 작품은 ‘양귀비’ ‘왕소군’ ‘비파행’ 등을 묘사한 10폭의 그림 속에 들어 있다.
구영은 화려한 채색으로 꼼꼼하게 인물을 묘사한 ‘공필채색화(工筆彩色畵)’의 대가답게 ‘자로문진’에서 그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림은 정확히 대각선으로 나뉜다. 공자 일행이 속한 오른쪽은 가파른 산과 울창한 나무로 뒤덮여 있다. 복잡다단한 세상 속에 있음을 상징한다. 그 중심에 공자가 탄 수레가 서 있다. 반면 걸익이 서 있는 왼쪽은 잘 정리된 밭과 잔잔한 황하가 펼쳐져 있다. 세상 어떤 시끄러움도 미치지 않는 평화로운 은둔지임을 상징한다. 그 끝에 걸익이 곡괭이에 의지해 서 있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자로에게 세상을 떠나 자신처럼 살 것을 설파한다. 아직 나루터가 어디인지를 알지 못한 자로는 그저 묵묵히 듣고 있다. 장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공자가 속해 있는 세상을 나무와 바위와 잡풀까지 꼼꼼하게 그린 반면 은자가 속한 세상은 실루엣처럼 흐릿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적이다.
장저와 걸익은 모두 도가(道家) 계열에 속하는 은자(隱者)들이다. 은자는 세속을 벗어나 숨어사는 사람으로 은둔자(隱遁者), 은인(隱人)이라 불린다. 비슷한 용어로 일민(逸民·산림에 숨어 살면서 관리가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과 일사(逸士·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숨어사는 선비)가 있다. 자로와 두 은자의 얘기에서도 알 수 있듯 도가와 유가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공자는 은자를 존경했지만 삶의 방식은 달랐다. 은자는 부조리한 현실을 피해 세상 밖에서 살았다. 덕분에 혼탁한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고고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공자는 정반대였다. 공자는 세상이 아무리 구역질 나는 탁류 속에 뒤범벅되었다 해도 결코 그곳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새나 짐승 같은 무리’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공자의 말 속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희로애락을 함께하겠다는 투명한 의지가 담겨 있다. 누군가의 삶의 방식을 비난하기는 쉽다. 그러나 비난 대신 그의 삶 속에 걸어들어가 함께 살아내기는 쉽지 않다. 공자는 비난 대신 더불어 사는 것을 선택한 실천가다. 이것이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이 은자가 아닌 공자를 선택한 이유다.
공자가 나루터로 가는 길을 묻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에 대해 조선 중기의 문신 간이(簡易) 최립(崔岦·1539~1612)은 ‘간이집(簡易集)’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세상에는 원래 나루터로 가는 길을 몰라서 나루터를 묻는 자가 있는데, 이는 자기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잃지 않으려 함이다.’ 나루터는 공자가 지향한 이상세계로 건너가는 다리다. 공자가 나루터를 모를 리 만무하다. 알면서도 굳이 제자를 시켜 나루터를 묻게 한 것은 은자에게 다시 한 번 삶의 철학에 대해 대화를 나눠 보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은자들은 공자와의 대화를 거부했다. 두 은자가 나루터를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은 공자를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난세에 은거하지 않고 도를 행하겠다고 천하를 주유하는 공자가 마뜩잖았던 것이다.
공자가 은자를 만난 이야기는 이뿐만이 아니다. 논어 ‘미자’ 편에는 두 편이 더 실려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날 자로가 공자를 따르다가 뒤처졌는데 우연히 한 노인과 마주쳤다. 그는 김매는 도구를 지팡이에 걸어 메고 있었다. 자로가 물었다. “어르신, 우리 선생님을 보셨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손발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곡도 가려내지 못하거늘, 누가 선생이란 말이오?”
세 번째는 초(楚)나라의 미치광이 접여(接輿)와 만날 때의 이야기다. 접여는 정치가 혼란스럽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짓으로 미친 척하며 산 은자였다. 그런 접여가 공자가 있는 곳을 지나가다가 이렇게 노래 불렀다. “봉황아. 봉황아, 너의 덕은 어찌 이리 쇠락했느냐. 지난날이야 돌이킬 수 없지만, 앞으로의 일은 따라갈 수 있구나.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지금 정치인들은 모두 위험할 따름이다.”
이 노래를 들은 공자는 수레에서 내려 그와 대화하려 했으나, 접여가 공자를 급하게 피해 가는 바람에 실패했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는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덕이 쇠했다고 한탄한 접여가 말을 잇는다.
“천하에 올바른 도가 있으면 성인은 그것을 이룩하지만, 천하에 올바른 도가 없으면 성인은 몸을 숨기고 살아갈 뿐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형벌을 면하는 게 고작일 뿐. 행복은 깃털보다 가벼워도 손에 담을 줄 모르고, 재앙은 땅보다 무거워도 피할 줄은 모른다.”
그러면서 ‘땅에 금 긋고 그 속에서 허둥대는 따위 짓은’ 위험하니 ‘도덕으로 사람을 대하는 짓은’ 그만두라고 충고한다.
공자가 유랑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은자들을 만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공자에 대한 그들의 평가가 매우 부정적이었음은 확실하다. 논어 ‘헌문’을 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자로가 석문이란 곳에 묵게 되었는데 새벽에 성문지기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자로가 ‘공자의 제자’라고 대답하자 성문지기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아, 그 안 될 줄 알면서도 행하는 사람 말이오?”
이런 비난과 손가락질을 견디면서도 공자는 결코 ‘나루터’를 건너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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