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자 미상, ‘추차동거’, 1904년, 2책, 목판에 채색, 27.6×37.8㎝, 장서각 |
남자친구 집에 인사하러 갔다. 오랫동안 사귀었으니 양가 부모만 허락한다면 결혼할 생각이었다. 무슨 옷을 입고 갈까. 어떤 선물을 사가지고 갈까. 시부모 될 분들을 처음 상견례하는 자리인 만큼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드디어 남자친구 집에 도착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현관문에 들어서니 내부가 잘 꾸며진 5성급 호텔 같았다. 화사하게 장식된 집은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집안 분위기가 거북했다. 그 넓은 집 어디에도 내 마음을 편안하게 내려놓을 만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웠지만 낡고 편안한 우리 집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불편함이 가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이곳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뚜렷해졌다. 한동안은 낯섦의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다. 처음 가는 장소라서 그럴 거라 생각했다. 불편함의 정체는 식사시간에 밝혀졌다. 그들은 오로지 그들만의 관심사를 얘기했다. 나라는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다. 대화에서 나를 배제함으로써 그들만의 세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노련한 처세술이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랬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결국 우리는 헤어졌다. 얼마 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어린 후배의 얘기다.
공자가 노(魯)나라를 떠난 것은 기원전 497년이었다. 55세에 시작한 유랑생활이 14년이나 계속될 줄은 공자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공자의 앞길에는 혹독한 시련과 쓰라린 좌절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위(衛)나라였다. 공자는 ‘노나라와 위나라가 형제 같은 사이’라고 말할 정도로 위나라를 친근하게 생각했다. 공자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위나라 시조 강숙(康叔)과 노나라의 시조 주공(周公)이 같은 어머니의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두 나라는 춘추시대 동안 가장 많은 인재와 능력자를 배출했다. 땅의 넓이나 재력에 있어서는 두 나라가 제(齊)나라를 능가하지 못했지만 문화에 있어서는 제나라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그런 만큼 두 나라 사람들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공자가 위나라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영공(靈公)은 기뻐하며 교외까지 영접을 나왔다. 영공은 공자에게 노나라에서와 똑같은 수준의 봉록(俸祿)과 재상으로의 임명을 약속했다. 처음부터 잘 풀린다고 생각했던 공자는 한껏 고무됐다. 노나라에서는 펼치지 못한 정치적 포부를 위나라에서는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당시 심정은 제자 자공과의 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자공이 물었다.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궤에 넣어 보관하시겠습니까? 좋은 상인을 구해 파시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것을 팔아야지! 나는 상인을 기다릴 것이다.”
위나라에서라면 자신을 비싼 가격에 팔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형제 같은 사이’도 잘나갈 때 얘기다. 상황이 바뀌면 관계는 언제든지 변질될 수 있다. 철석같이 믿었던 영공에게서는 열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모함으로 영공의 미움을 살 지경에 이르렀다. 공자는 위나라를 떠나 진(陳)나라로 갔다. 진나라의 광(匡)이라는 지역에서 겪은 고난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여곡절 끝에 공자는 다시 위나라로 왔다. 공자는 거백옥(籧伯玉)의 집에 머물렀다. 거백옥은 위나라의 대부로 공자가 공경하고 가르침을 받은 인물이었다.
공자는 다시 위나라 군주인 영공을 찾아갔다. 영공의 마음이 이미 자신에게서 떠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영공과 공자 사이에 간략한 인사말이 오고갔다. 인사가 끝나자 영공이 공자에게 군사를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저는 예의에 관한 일은 일찍이 들은 바가 있습니다만, 군사를 배치하고 운용하는 일에 대해서는 배운 바가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영공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공자는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군자일 뿐 군사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영공이 딴소리를 했다. 공자를 등용할 뜻이 없다는 외교적 표현이었다. 후배가 남자친구 집에서 무시당한 것과 똑같은 현상이었다. 여기서도 다시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가. 유랑생활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공자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남자(南子)를 만나볼까. 남자는 영공의 부인으로 나라의 모든 권력이 그녀의 치마폭에서 나온다고 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갈까 말까 주저하고 있을 때 남자에게 연락이 왔다. 공자는 ‘구슬 부딪치는 소리가 은은히 울리는’ 삼베 장막 안의 남자를 향해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공자가 남자를 만나고 오자 직설적인 제자 자로(子路)가 툴툴거렸다. 공자가 변명했다. “찾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예를 행해오니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변명에도 자로는 여전히 스승을 의심했다. 다시 공자가 변명했다. “내게 잘못된 행동이 있다면 하늘이 나를 버리리라, 버리리라!”
스승이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려던 자로가 왜 공자에게 불만을 가졌을까. 남자가 악명 높은 호색녀였기 때문이다. 영공은 소문난 바람둥이였는데 남자도 그에 못지않았다. 남자는 송(宋)나라의 제후가에서 영공에게 시집온 후 친정 오빠 송조(宋朝)와 불륜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영공은 둘의 관계를 추궁하는 대신 오히려 남자의 오빠를 초청해 ‘부인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들의 부도덕한 행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송나라 농부들은 남자의 애정행각을 다음과 같이 빗대 조롱했다. ‘새끼돼지를 얻으려는 일이 이미 마무리되었다면 수퇘지는 어찌 돌려보내지 않는가?’ 새끼돼지를 얻으려는 자는 남자를, 수퇘지는 송조를 의미했다. 한마디로 말해 남자(南子)는 ‘남자(男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요물로 손가락질당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강직한 성격의 자로가 스승에게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공자가 남자를 만난 결과는 어땠을까. 별 효과가 없었던 듯하다. 그래도 공자는 여전히 영공 주위를 맴돌았다. 초조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맹자가 평하기를 “공자께서는 석 달 동안 임금을 모시지 못하면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조바심을 쳤으며, 다른 나라에 갈 때는 제후와의 접견에 대비해 선물을 꼭 준비하고 다녔다”고 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영공이 그의 부인과 함께 수레를 타고 유람을 나왔다. 그러면서 공자로 하여금 뒤의 마차를 타고 자기를 따르게 하고는 거리를 지나갔다. 공자는 이런 상황이 심히 부끄러웠다.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낀 공자는 이렇게 탄식했다.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것과 같이 훌륭한 덕을 좋아하는 사람을 나는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구나!”
‘추차동거(醜次同車·수레를 타고 함께 가는 것을 부끄러워하다)’는 당시 상황을 그린 장면이다. 오른쪽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 속에 영공과 남자가 앉아 있고 왼쪽에는 소박한 우차 앞에 공자 일행이 서 있다. 영공이 공자에게 자신의 뒤를 따르라고 방금 전에 얘기한 듯 공자는 아직 수레에 오르지 않았다. 화려한 영공 일행과 초라한 공자 일행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이곳은 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을까. 결국 공자는 위나라를 떠나 조(曹)나라를 거쳐 송(宋)나라로 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사건이 공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점입가경이 따로 없다. 행복 끝 고생 시작, 공자의 유랑생활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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