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자미상, ‘예타삼도’, 1904년, 2책, 목판채색, 27.6×37.8㎝, 장서각 |
우리가 대통령을 뽑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바람에서다. 부자와 권력자의 뜻대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의 뜻을 배려해 달라는 소망에서다. 그런데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이념도 다르고 세대도 다른 수많은 사람의 요구를 전부 충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러 계층의 사람을 고루 만족시키려면 적절한 균형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일정 부분 자신들의 손 안에 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쉽지 않은 얘기다. 새로 뽑은 대통령에게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 것은 쉽지 않은 일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대통령은 기득권 세력에 휘둘려 거친 파도 속을 표류하는 난파선이 될 수 있다. 현실에서 무수히 확인할 수 있는 실정이다.
이런 사례는 역사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왕이 훌륭한 성품에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는 명주(明主)라면 그 나라는 발전한다. 그러나 방탕하고 난폭한 폭군(暴君)이라면 발전은커녕 백성은 도탄에 빠진다. 성군(聖君)이나 폭군은 아닐지라도 어리석고 멍청한 왕(幽王)이나 도리를 모르는 부끄러운 왕(赧王)일 경우에도 백성의 삶이 팍팍하기는 마찬가지다.
공자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공자가 대사구(大司寇) 때 노나라 군주는 정공(定公)이었다. 당시 권력은 군주가 아닌, 실세그룹인 삼환(三桓·환공의 자손)이 쥐고 있었다. 삼환은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 계손씨(季孫氏) 등 세 가문으로, 그중 계손씨가 수장이었다. 이들은 공자가 태어나기 백여 년 전부터 권력을 쥐고 있었다.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국정을 주물렀다. 논어 ‘팔일’에는 삼환의 오만방자한 행태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적혀 있다.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팔일무를 뜰에서 추게 했으니, 이것을 참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참을 수 없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에게만 허용된 춤이다. 일(佾)은 여러 사람이 줄을 지어 추는 춤으로 가로와 세로에 같은 인원이 정방형으로 배치된다. 팔일무는 가로와 세로에 여덟 명 씩 줄을 서서 모두 64명이 춘다. 고대 중국에서는 신분에 따라 의식에 쓰는 춤의 형식이 정해져 있었다. 천자는 팔일무, 제후는 육일무(36명), 대부는 사일무(16명), 사는 이일무(4명)를 추게 할 수 있다.
춤은 단순히 즐기기 위한 오락이 아니었다. 예(禮)와 악(樂)은 고대 종법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틀이었다. 예는 음악으로 표현되고, 음악은 각 계층의 권력과 신분을 드러내는 엄숙한 형식이었다. 예악은 감상을 위한 축제나 문화제가 아니라 당시 신분사회를 확인할 수 있는 권력의 외양이었다.
공자가 계씨에 대해 분노한 것은 계씨가 제후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제후는 당연히 육일무를 써야 한다. 그런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다 보니 팔일무를 하게 해 천자의 권력을 넘봤다. 공자는 계씨의 행동이 사회질서를 어지럽힌다고 판단했다. 계씨의 행동을 보고도 참아낼 수 있다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참지 못할 것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공자는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지 않으면 나라의 질서가 바로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공자는 옛 성왕(聖王)이 정한 원칙과 법도를 지켜야 한다는 원리주의자였다. 사회 안정의 정점에 군주가 있다고 믿었다. 삼환같이 무례한 자들은 안정된 사회질서를 깨뜨리는 자들이었다. 역대 군주도 삼환을 견제하고 왕권을 회복하고자 시도했다. 정공 이전의 소공(邵公)이 대표적이다. 소공은 계손씨의 닭싸움을 핑계로 그를 공격했지만 오히려 쫓기는 신세가 되어 제나라로 도망가서 죽었다. 소공을 쫓아낸 계씨가 바로 뜰에서 팔일무를 추게 한 계평자(季平子)였다. 그가 바로 공자가 분노한 대부였다.
공자도 소공을 따라 제나라에 갔다 왔다. 공자는 외국으로 망명한 군주를 보면서 힘없는 사람의 말로가 어떤지를 생생하게 목격했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는 상태에서 기득권 세력에 대항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느꼈다. 공자는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제나라에서 돌아온 공자가 관직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제자들 양성에 전력한 것도 그런 현실적 제약 때문이었다.
소공이 죽고 정공이 즉위했다. 계손씨의 집안도 계평자에서 계환자(季桓子)로 바뀌었다. 공자는 대사구가 됐다. 공자는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공자는 삼환의 근거지를 제거함으로 해서 그들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그것이 삼도(三都)를 허무는 것이었다. 삼도는 계손씨의 비(費), 숙손씨의 후(郈), 맹손씨의 성(郕) 등 그들이 다스리는 세 도시를 뜻한다. 공자는 삼도를 허물 명분을 다음과 같이 정공에게 아뢰었다.
“신하는 병기를 감출 수 없고, 대부는 고을에 백치(百雉)의 성을 쌓을 수 없는 것이 옛날부터의 제도입니다. 그런데 계손씨와 맹손씨, 숙손씨의 성곽은 모두 이 규정을 넘어서고 있으니, 모두 그 제도에 맞게 성곽을 헐어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공자의 말을 들은 정공은 세 곳의 성곽을 예법에 맞게 헐어버리도록 했다. 공자는 계씨의 가신으로 있던 제자 중유(仲由)로 하여금 삼도를 허물게 했다. ‘예타삼도(禮墯三都·예법에 따라 세 곳의 성곽을 헐다)’는 그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성곽 위로 붉은 옷을 입은 정공이 공자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 성곽 아래서는 중유의 지휘 아래 군사들이 반항하는 세력을 쫓아내고 있다. 세 가문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고 싸움은 치열했다. 그림에는 위태로운 현장 상황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않다. 단순히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한 삽도(揷圖)인 듯 위기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공자의 무모한 도전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일지도 모른다.
공자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거사가 실패하자 어리석고 멍청한 왕(幽王) 정공(定公)은 공자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린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공자가 고국을 떠나 주유열국하게 된 배경이다. 공자 나이 55세 때의 일이었다. 공자가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는 14년 동안 노나라는 결코 안정되지 않았다. 여전히 삼환이 권력을 휘두르며 노나라를 좌지우지했다. 우리는 공자 시대와 달리 대통령을 5년마다 한 번씩 뽑을 수 있다. 능력이 부족한 대통령이라도 5년이면 바뀐다. 그런데도 국민의 삶이 그다지 바뀌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삼환 같은 세습귀족도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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