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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공자]아버지가 도둑질하면 아들은 신고해야 할까-사부자송

바람아님 2014. 3. 18. 11:51
▲ ‘사부자송’, 작자 미상, 공부자성적도, 산동곡부문물편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 자식은 부모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비춰 보고 몸가짐을 바르게 한다. 옷 매무새는 단정한지, 얼굴 표정은 온화한지, 말투는 공손한지 거울을 보고 확인할 수 있다. 자식이 비뚤어지고 엇나갈 때 그 원인은 십중팔구 부모에게 있다. 자식이 들여다보는 거울이 흐리기 때문이다. 자식이 몹쓸 짓을 할 때 부모 된 이의 덕을 탓하는 것도 자식의 뿌리가 부모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대사구(大司寇) 벼슬에 있을 때 부자(父子)간 소송건이 있었다. 공자는 법 집행에 앞서 그 아버지와 아들을 옥에 가두고 3개월이 지나도록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얼마 후 아버지가 소송을 철회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소송을 제기했던 모양이다. 거울이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칼을 휘두른 격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화가 치밀어오를 때는 몰랐는데 감옥이라는 유폐된 공간에 격리되고 나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들이 곧 아버지라는 것을. 큰 부끄러움을 느낀 아버지가 소송을 철회한 것은 당연한 결말이다. 공자가 이들에게 즉각적으로 형을 집행하지 않은 것은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천륜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을 주고자 함이었다. 아버지가 반성하자 공자는 곧 부자를 사면했다. 공자의 이야기는 당시 권력자인 계손씨(季孫氏)에게 보고됐다. 계손씨는 공자의 직무태만을 나무랐다.
   
   “사구(공자)가 나를 속이고 있다. 지난번 나에게 ‘국가는 반드시 효를 먼저 가르쳐야 한다. 나는 이제 하나의 불효한 자를 죽여 백성들에게 효를 가르쳤으니 또한 옳지 않은가’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 저 불효한 자를 용서해 주다니 어찌된 일인가.”
   
   제자 염유(冉有)가 공자에게 이를 고하자 공자가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윗사람이 도를 잃어 아랫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효로써 교화시키지 못하고 옥사만 다스린다면 이는 무고한 자를 죽이는 것이 된다. 삼군(三軍)이 크게 패한다 해도 그 병사들을 목 벨 수 없는 것이며, 옥에 죄수가 많다 해도 형벌을 마구 쓸 수는 없다. 왜 그렇겠는가. 위에서 교화가 행해지지 못하였기에 그런 것이지 백성들에게 죄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릇 법령은 제대로 갖추지 아니한 채 죄를 다스리는 데만 집착한다면 이는 백성을 해치는 짓이요, 세금 거두기를 때가 없이 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포악한 짓을 하는 것이며, 시험해 보지도 아니하고 성과만 책임 지우는 것은 백성을 학대하는 것이다. 정치에서 이 세 가지 폐단이 없어진 뒤라야만 형벌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동문서답이다. 계손씨가 주장한 것은 일벌백계(一罰百戒)였다. 한 사람에게 벌을 주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고발하고 아들이 아버지와 맞서 싸운 콩가루 집안은 본보기로 처벌해야 다시는 불효막심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 일 하라고 사구에 앉혀놓은 것 아닌가.
   
   계손씨의 불편한 심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공자는 전혀 엉뚱한 대답으로 자신의 소신을 밝힌다. 옥사를 다스리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윗사람의 도덕 불감증과 제도의 허점이다. 위에서 솔선수범하면 아랫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윗사람을 본받게 되어 있다. 소송을 제기한 부자를 3개월 동안 외면했던 것은 서로에게 반성할 시간을 준 것이다. 스스로 반성함으로써 잘못을 뉘우친다면 백 마디 말이나 천 가지 형벌보다 더 값진 판결이라 할 수 있다. 백성을 가르치려 들지 말고 정치하는 너희들부터 정신을 차려라. 이 한심한 자들아. 이것이 공자의 대답이었다.
   
   ‘사부자송(赦父子訟·부자간의 소송을 해결하다)’은 두 가지 사건을 한 화면에 그렸다. 오른쪽은 공자가 병풍 앞에 앉아 소송을 제기한 부자의 얘기를 듣는 장면이다. 왼쪽은 공자가 나무 아래에서 사건의 진행 과정과 형벌의 적용에 대해 제자들에게 얘기하는 장면이다. 머리에 관을 쓴 모습은 공자가 관직에 있을 때만 볼 수 있다. 그림은 사건의 전개 순서에 따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어간다. 두 장면 사이에는 대각선으로 언덕을 그려 시간의 경과를 암시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논어’의 자로(子路)편에도 나온다. 섭공(葉公·초나라 대부)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마을에 몸가짐이 바른 자가 있으니, 그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것을 고발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기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주지만 정직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
   
   주희(朱熹·1130~1200)는 ‘논어집주(論語集注)’에서 이 부분을 ‘부자 사이는 서로 감싸주는 것이 천리와 인정의 지극함이다. 따라서 정직을 구하지 않아도 정직이 그 안에 있다’라고 풀이했다. 설령 아버지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 해도 아들은 아버지를 감싸주고 숨겨주어야 하는 것이 천륜이다. 가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공자의 입장은 맹자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맹자(孟子)’ ‘진심(盡心)’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도응(桃應)이 맹자에게 물었다. “순(舜)임금의 아버지인 고수(瞽瞍)가 사람을 죽였다면 순은 어떻게 했을까요.” 맹자가 말했다. “순임금은 천자(天子) 자리를 마치 헌신짝 버리듯 하고 몰래 아버지를 업고 도망가 바닷가 외진 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공자에서 맹자로 이어지는 유가(儒家)의 입장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감싸주는 것을 천륜으로 여긴 것이라면, 섭공의 입장은 묵가(墨家)에 가깝다. 묵가의 문인 중에 거자(鉅子) 복돈(腹敦)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들이 진(秦)나라에 있을 때 사람을 죽였다. 진의 혜왕(惠王)은 복돈이 연로한 데다 다른 아들이 없어 복돈의 아들을 처형하지 말라고 명했다. 그 말을 들은 복돈은 단호한 목소리로 “우리 묵가 문인들의 법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어야 하고 사람을 다치게 한 자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무릇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지 않도록 금지하는 것은 천하가 다 함께 지켜야 하는 공법(公法)입니다. 왕께서 비록 제 아들에게 은덕을 베푸셔서 옥리로 하여금 그를 처형하지 않게 하신다 해도 저는 묵가 문인들의 법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복돈은 혜왕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마침내 자신의 아들을 처형했다. 임금의 사면에도 불구하고 법을 지키는 것에서는 예외를 두지 않았던 묵가의 단호하면서도 엄정한 행위를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온갖 흉악한 범죄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아들이 유흥비를 갚기 위해 아버지를 살해하고, 고등학생이 10만원 때문에 친구를 살해하고, 삼촌이 어린 조카를 강간하려다 실패하자 살해한다. 이럴 때 공자 같은 법관이 있었다면 어떻게 판결했을까. 복돈 같은 묵가가 있었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공자와 묵자는 대척점에 서 있지만 오늘의 우리들에게 죄인을 근본적으로 개과천선시킬 수 있는 접근법을 고민하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