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그림으로 읽는 공자]재상이 된 공자가 처음 한 일은 사형이었다-주소정묘

바람아님 2014. 3. 16. 11:46
▲ 김진여, ‘주소정묘’, 1700년, 비단에 색, 32×57㎝, 전주박물관

    공자가 소정묘(少正卯)를 주살(誅殺)했다. 조정에 나가 재상의 임무를 수행한 지 7일 만에 행해진 조치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예를 실천한다는 사람이 공직에 나가자마자 행한 일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니. 제자 자공(子貢)은 그 이유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스승께 여쭈었다.
   
   “무릇 소정묘는 노나라에서 널리 알려진 사람인데 지금 선생님께서 정사에 나오셔서 그를 처음 표적으로 삼아 죽이셨으니, 혹 선생님께서 실수하신 것인지요?”
   
   의구심과 걱정이 뒤섞인 질문이었다. ‘소정묘는 나라에서 알아주는 귀족입니다. 비록 스승님이 지금 대사구(大司寇)에 오르셨다고는 하나 자칫 권력남용으로 귀족들의 반발을 사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혹시 귀족 출신이 아닌 스승님이 높은 벼슬을 하게 되자 평소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사람에게 본때를 보여주시려는 것 아닙니까?’ 제자의 입장에서 에둘러 표현했지만 본뜻은 그런 의미였다.
   
   사십대를 스승과 학자로 보낸 공자가 관직에 나아간 때는 오십대였다. 그 시기는 대략 4년여 동안으로 51세부터 55세까지였다. 첫 번째 관직은 중도재(中都宰)였다. 중도는 산둥성(山東省)에 있는 노(魯)나라의 현(縣)으로 중도재는 중도현의 현령(縣令)이다. 공자는 중도재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 소사공(小司空)으로 발탁된다. 중도재가 지방 공무원이라면 소사공은 중앙정부의 공무원으로 차관급에 해당한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소사공을 지낸 기간은 매우 짧았다. 얼마 되지 않아 대사구에 올랐다. 기원전 500년, 그의 나이 52세 때였다. 대사구는 삼경(三卿·세 명의 대신으로 司徒·司馬·司空)에 버금가는 벼슬로 현재의 법무부 장관에 해당하는 직위다. 귀족 출신이 아닌 사람이 맡을 수 있는 최고의 벼슬이었다.
   
   높은 자리에 앉자마자 한 일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으니 제자들이 의아해 할 만도 하다. 소정묘는 살인자도 아니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도 아닌 데다 신분이 귀족인 대부(大夫)였다. 조용히 넘어가면 좋을 것을 벌집을 쑤셔놓은 격이니 제자로서 당연한 질문이었다.
   
   제자의 걱정을 모를 리 없는 공자가 대답했다.
   
   “좀 앉아라. 내가 그 까닭을 일러 주겠다. 천하에 큰 죄악이 다섯 가지가 있다. 절도 같은 것은 여기에 해당되지도 않는다. 첫째는 마음이 반역하고자 하는 위험한 생각을 하는 것이고, 둘째는 행실이 편벽되고 고집스러운 것이고, 셋째는 거짓된 말을 하고 변론을 잘하는 것이다. 넷째는 의리와 무관하게 가볍고 추한 것만 기억하고 잡다하게 아는 것이고, 다섯째는 그릇된 일만 따르면서 자신의 몸을 기름지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 다섯 가지 중에 하나만 범해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인데 소정묘는 이 다섯 가지 죄를 모두 저질렀으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 거처하는 곳에서는 무리를 모아 당파를 이루고, 그 말솜씨를 보면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쩔쩔매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 앞에서는 잘난 체한다. 이런 자는 사람 중의 간웅(姦雄)이니 제거해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은 소정묘가 ‘위험한 생각’의 소유자인데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서 죽여야 한다는 뜻이다. 공자의 생애를 살펴볼 때 가장 난해한 부분이 소정묘를 죽인 이유를 설명한 곳이다. ‘논어’에 언급된 공자의 말은 소박하면서도 간단명료하다. 뜻은 분명하고 논지는 확실하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다르다. 상당한 세력을 가진 벼슬아치를 사형시키면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간사한 사람’이기 때문이란다. 명분이 뚜렷하지 않다. 간사하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면 살아남을 자가 몇 명이나 될 것인가. 거짓과 권모술수가 판치는 우리 시대의 정치판에서는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명이다. 공자가 과연 이런 무모한 일을 했을 것인가 하는 점은 역대 공자 연구자들 사이에서 계속된 논란거리였다. 그러나 ‘사기’의 ‘공자세가’와 ‘공자가어’의 ‘시주’ 그리고 ‘순자’에는 소정묘를 주살한 내용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이런 논란과 관계없이 ‘공자성적도’에는 ‘주소정묘(誅少正卯)’라는 항목이 분명하게 삽입돼 있다. 김진여(金振汝·조선 후기)가 그린 ‘주소정묘’도 대표적인 작품이다. 관모를 쓴 대사구 공자가 양관(兩觀) 아래에서 소정묘를 단죄하는 장면이다. 양관은 노나라의 궁궐 이름이다. 공자는 병풍 앞에 앉아 있고 그의 앞에는 결박된 소정묘가 무릎 꿇고 앉아 있다. 제자들을 거느린 공자는 오른손을 들어 단호하게 소정묘의 처형을 지시한다. 공자의 지시에 따라 칼을 든 집행관이 곧 사형수의 목을 내려칠 것이다.
   
   이곳이 소름 끼치는 사형장인데 그림 왼쪽에는 사형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말을 몰고 가는 사람, 양을 놓고 흥정하는 사람, 얌전하게 걸어가는 여인들이 모두 처형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자신들이 하는 일에 열중해 있다. 세 무리의 인물들이 소정묘의 처형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일까. ‘공자가어’의 ‘상로’편에는 이 그림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적혀 있다.
   
   공자가 정치를 하기 전 노나라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었다. 양고기를 파는 심유씨(沈猶氏)라는 자는 양에게 아침마다 물을 먹여 크게 보이게 한 뒤 시장 사람들을 속였으며, 공신씨(公愼氏)라는 자는 자기 아내의 음탕한 짓을 제지하지 못했으며, 신궤씨(愼潰氏)라는 자는 사치를 부리는 정도가 법을 넘었으며, 가축을 파는 자는 말을 꾸며서 값을 제멋대로 받았다. 꼭 우리 시대의 신문 사회면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공자가 정치에 참여하자 이런 폐단들이 사라졌다. 심유씨는 감히 양에게 물을 먹이지 못했으며, 공신씨는 음탕한 아내를 축출해 버렸으며, 신궤씨는 국경을 넘어 이사를 가고 말았다. 이렇게 석 달이 되자 소와 말을 파는 자도 값을 더 받지 않게 되었고, 양과 돼지고기를 파는 자도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되었으며, 길 가는 남녀들은 그 다니는 길을 달리하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 가는 자가 없게 되었다. 또 남자는 충성과 신의를 숭상하게 되었으며, 여자는 정절과 순리를 숭상하게 되었다.
   
   그림 왼쪽에 등장하는 말을 몰고 가는 사람과 양을 놓고 흥정하는 사람들은 ‘값을 더 받지 않고’ 정직하게 장사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저울을 들고 가격을 협상하는 사람들은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진다. 공정한 거래가 성사됐기 때문이다. 네 명의 여인이 걷는 모습은 ‘길 가는 남녀들은 그 다니는 길을 달리했다’는 문구를 묘사한 것이다. 품위를 잃지 않은 여인들의 걸음걸이가 얌전하다. 여자들과 ‘다니는 길’을 달리한 남자들의 모습은 어디에 있을까. 그 문제를 화가 김진여는 여인들과 장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언덕이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게 그려 넣음으로써 해결했다. 남자와 여자가 하는 일이 다르듯 가는 길도 다르다는 뜻이다.
   
   ‘주소정묘’는 다른 시간대에 발생한 여러 가지 사건을 한 화면에 그려 넣은 방식이다. 다양한 이야기를 서술하듯 보여줄 때 화가들이 종종 차용하는 구도법이다. 소정묘를 처형한 사건과 주민들의 행동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성도 없지만 모두 공자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라는 공통성이 있다. 걸어가는 여인이 고개를 돌려 공자를 뒤돌아보는 모습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공자가 관직에 머물렀던 기간은 4년여 동안으로 매우 짧았다. 그러나 이때의 행적은 여러 자료에 비교적 자세히 수록돼 있다. 소정묘를 처형한 공자의 다음 목표는 ‘국격(國格)’을 세우는 일이었다. 공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목표를 실행한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