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서울신문 2008-08-11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금주령으로 깨진 잔치흥 ‘조선밴드’가 살려놓다
김홍도의 ‘무동’(그림 1)은 너무나 잘 알려진 그림이다.
한데 국악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야 잘 알겠지만, 일반인들에게 그림의 내용은 낯설 것이다.
이 그림은 삼현육각을 잡히고 있는 그림이다. 삼현육각은 좌고 1, 장구 1, 피리 2, 대금 1, 해금 1로 편성한다.
그림의 왼쪽 위를 보면 벙거지를 쓰고 매달아 놓은 북을 치고 있는 사내가 있다. 좌고를 치는 중이다.
그 오른쪽의 갓을 쓴 사내는 장구를 치고 있고, 또 그 오른쪽의 사내 둘은 피리를 불고 있다.
푸른 저고리를 입은 사내는 뺨이 볼록 나왔으니, 소리를 내느라 한창 기운을 쓰고 있는 참이다.
그 아래 사내는 대금을 불고 있고, 그 아래 사내는 해금을 켜고 있다. 이것이 곧 삼현육각의 편성이다.
삼현육각에 대해서는 국악계에 많은
논문이 있다.
하지만 그 복잡한 사정을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속편’에 알기 쉬운 설명이 있다.
‘오례의’‘악학궤범’ 이하의 음악책에
보이는 악기와 악공은 국가 의례상에
쓰는 정식의 것이거니와 그것 한 판을
갖춤은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또 꼭
그래야만 할 필요도 없어서 언제부터인지 약식의 악반(樂班)이 성립하여 어지간한 경우에는 이것만으로 수용(需用)에
충당하고, 더욱 민간에서의 주악은
이 정도로 만족하는 신 기준이 성립하니,
이것이 삼현육각, 줄여서 삼현 혹
육각이라는 것이요, 근세에 보통으로
풍악을 잡힌다 하면 이것을 가르킵니다.
즉 원래 ‘오례의’나 ‘악학궤범’에서
정한 정식 악반이 아니라,
줄인 약식 악반을 말하는 것이
삼현육각이다. 더 읽어 보자.
삼현육각은 북·장구·해금·피리(한쌍)·
대금을 이르니, 삼현육각의 말뜻은
진실로 명백치 아니하되, 대개 삼현은
해금을 따로 친 것이요, 육각은 악기의
총수를 말한 것인 모양입니다(巫樂은
위에 든 5종 외에 지금이 들어가
여섯이 됩니다).
삼현육각 대신 ‘육잡이’란 별칭도
있습니다.
여하간 북·장구·해금·피리 1쌍·대금
여섯 가지 합주는 근세 조선에 성립한
악반 조직입니다.
삼현육각은 언제 생겼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로 조선후기에 널리
유행한 음악이다.
삼현육각은 잔치의 흥을 돋울 때 많이
사용되었다.
또는 무용의 반주음악으로, 벼슬아치의 나들이에 위세용 행진곡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물론 삼현육각이 늘 다 갖추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지방에 따라 연주하는
레퍼토리가 약간씩 차이가 지기도 하였다.
기생이 검무를 추는 모습을 그린
신윤복의 그림이 남아 있는데, 여기도
삼현육각이 보인다.
조선후기의 유흥공간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밴드 구성이었던 것이다.
삼현육각이 이렇게 풍속화의 소재가 될 정도로 유명하게 된 것은, 조선후기에 와서 민간의 음악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조금 엉뚱한 이유가 있다.
영조는 무려 52년 동안 왕위에 있었던 인물이다.52년 동안 그가 가장 강력하게 추진한 정책이 금주정책이었다.
백성이 먹을 곡식도 부족한데 술이 웬 말이냐는 것이 영조의 논리였다.
궁중의 잔치, 제사에도 술을 사용하지 않았고 자신도 마시지 않았으니, 민간에서는 정말 술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민간에서 부모가 환갑을 맞이하면 잔치를 벌인다. 하지만 술을 쓸 수 없으니, 흥이 안 난다.
그래서 풍악을 크게 잡혀 잔치를 흥겹게 하고, 남에게 과시도 한다. 여기서 음악에 대한 수요가 발생한다.
삼현육각에 동원되는 연주자들은 대개 장악원 소속의 악공들이다.
장악원 악사들은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기간은 제법 대우를 받았으나, 임진왜란 이후부터 국가는 이들의 생계를 책임질
능력이 없었다. 악공들은 여러 차례 조정에 하소연하였으나, 하소연을 들어줄 조정이 아니다.
결국 밖에서 해결책을 찾는 수밖에. 악공들은 기생, 가객(歌客), 금객(琴客) 등과 어울려 일종의 밴드를 결성하여
민간의 요청에 응하고 연주료를 받았던 것이다. 아마 그림에 나오는 삼현육각 역시 그런 밴드일 것이다.
이제 춤을 추는 사람을 보자. 어린 아이다. 옷자락이 날리고 표정도 흥겹다. 추는 춤은 무슨 춤인지 모른다.
국악을 하는 분에게 물어보았더니, 삼현육각 반주에는 궁중무용은 아니고 민속춤을 추는데, 승무나 검무를 춘다고 한다.
검무를 추는 것은 신윤복의 그림에 나오니 확인이 된다. 한데 위의 춤은 승무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다.
춤추는 아이를 무동이라고 한다. 김홍도의 ‘기로세련계도(耆老世聯 圖)’(그림 2)는 노인들이 잔치를 벌이고 난 뒤 기념으로
그린 것인데, 중앙의 춤을 추는 두 사람을 자세히 보면 역시 무동이다. 무동이 출현한 것은 기생과 관련이 있다.
원래 기녀제도는 한국만의 독특한 것이다. 물론 기녀는 중국에도 있다.
하지만 중국은 기녀를 국가가 관리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습속이다.
조선은 알다시피 성리학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성리학은 말하자면 윤리학이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물질적 육체적 욕망을 절제할 것(사실은 끊어버릴 것)을 요구한다.
성리학을 내면화한 사람이 곧 사대부이고, 사대부가 정치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 성리학이 주장하는 바다.
그렇다면 사대부들은 보다 윤리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
기생제도는 바로 지배자가 되는 사대부들의 윤리화와 충돌하였다.
조선은 성리학을 진리로 표방했지만, 불교사회인 고려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다.
기녀제도도 그 중 하나였고, 기녀제도에 대해서도 별 말이 없었다.
기녀는 관청의 노비였다. 즉 서울과 지방 관청에 소속된 노비 중에서 일부를 뽑아 기녀로 만들었던 것이다.
더욱이 3년에 한 번 지방의 기녀를 서울로 뽑아 올려 장악원에서 소속시켜 춤과 노래를 가르치고, 궁중의 각종 잔치와
사대부의 잔치에 동원했던 것이다. 아무도 여기에 대해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런데 세종 12년 7월 28일 김종서가 기녀를
없애자고, 즉 기녀제도를 없애자고 요청한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예와 음악은 나라를 다스리는 큰 근본입니다.
……우리나라의 예와 음악은 중국과도 견줄 만한 것이므로, 옛날에 중국 사신 육옹·단목지·주탁 등이 사명을 받들고 왔다가
예와 음악이 갖추어져 있음을 보고는 또한 모두 아름다움을 칭찬하였으나, 다만 여악(女樂, 기녀)이 섞여 있는 것을 혐의쩍게
여겼습니다.
중국 사신들은 조선에 와서 연회에 참석했고, 거기서 기녀의 춤과 노래를 보았던 것이다.
중국 조정에는 공식적으로 기녀를 동원하는 일이 없었으니, 이들이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세종은 김종서의 말에 망설인다. 이런저런 논란 끝에 기녀를 대체할 수단으로 무동을 쓸 것이 결정되었다.
세종 15년 1월 1일 회례연에서 아악이 초연될 때 무동과 가동(歌童)을 씀으로써 국가의 공식 연회에서 기녀가 제거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기생제도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기녀제도는 여전히 있었다.
무동도 문제가 되었다. 무동은 보통 10대 초반의 노비의 자식을 뽑아서 쓰는데, 이들은 금방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동을 세종 25년에 또 폐지한다. 다시 기녀를 쓰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문종 단종 성종 세종 연간에 관료들은 중국 사신의 접대에 기녀를 쓰지 말자고 줄기차게 청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연산군 때는 기녀를 엄청나게 증원했으니, 폐지란 말도 꺼내지 못했다.
기녀가 폐지된 것은 중종 때 조광조가 이끄는 기묘사림에 의해서다.
기묘사림은 연산군의 황음을 경험했던 터라, 기녀를 없애자고 주장했고, 그 주장을 따라 기녀제도가 혁파되었다.
하지만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쫓겨난 뒤 기녀제도는 복구되었다.
이후로는 영원히 기녀를 없애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동은? 무동 역시 그대로 두었다. 이것이 이 그림에 무동이 나오는 연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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