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活文化/세상이야기

[일사일언] 내 주말의 '흠집'

바람아님 2014. 11. 12. 10:51

(출처-조선일보 2014.11.12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지난 주말 오후 경찰서에서 문자 연락을 받았다. 
문제가 생겼으니 급히 교통과에 전화를 해달라는 것이다. 
경찰서를 사칭한 고도의 보이스 피싱 사기가 요즘 판을 친다는 지인들의 이야기가 떠올라 
처음엔 무시했다. 그러나 연락이 계속 와서 반신반의하며 전화를 했다. 
보이스 피싱이 아니었다.

몇 시간 전 내가 자동차 접촉 사고를 냈고, 피해자가 블랙박스 영상을 가지고 와서 경찰서에 
신고했다는 것이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학교에 오며 차로 변경을 하다 옆 차와 아슬아슬하게 닿을 뻔했던 장면이 있었다. 
그 당시 구두로 사과를 했고, 차체에 별 이상이 없는 것 같아서 차를 세우지도 않고 서로 헤어졌다. 
그런데 신고라니? 주차장에 내려가 내 차를 살펴보았다. 
설마 이 자국인가 싶을 정도로 작은 흔적을 한참 만에 차량 후미에서 발견했다. 
부엌 수세미로 약 1㎝를 아주 살짝 긁은 정도의 경미한 자국이었다. 
아무튼 경찰서로 향했다.

[일사일언] 내 주말의 '흠집'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신혼부부가 
경찰서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장해 보였다. 
마치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다가 도주한 
나치 전범을 잡았다는 표정이었다. 
사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그쪽 보험사 직원은 
한술 더 떴다. 
나를 다분히 의식하며 그는 큰 목소리로 
자기 고객에게 이렇게 조언을 했다. 
"필요하면 우리 측에서 소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피해 차량의 상태를 직접 확인한 뒤 
보험사 직원마저도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수세미 자국'을 가지고 여러 사람이 오버를 
했던 것이다. 
나의 주말 반나절은 이렇게 날아갔다.

세상으로부터 받는 부당한 피해는 당연히 보상을 받아야 된다. 하지만 세상과 대적하며 
단 1000원의 손해도 볼 수 없다는 
전사와 같은 결의는 모두를 피곤하게 만든다. 
자신에게는 스트레스가 되고, 타인에게는 
공해가 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남에게 손해를 입히고 의식 못 한 채 지나간 일들은 까맣게 잊는 것이다. 
인생도, 자동차도 흠집과 얼룩이 생기기 마련이다. 
세상의 여유와 너그러움이 그리운 도심의 주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