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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읽는 한시] 골목길에서(衚衕絶句)

바람아님 2014. 12. 22. 09:23

(출처-조선일보 2014.12.22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골목길에서


밝은 해가 굴러서 서쪽으로 떨어지면
그때마다 나는 통곡하고 싶어진다.
그러려니 일상으로 여기는 세상 사람들
그냥 다만 저녁밥을 내오라 재촉한다.

衚衕絶句(호동절구)


白日轣轆西墜(백일역록서추)
此時吾每欲哭(차시오매욕곡)
世人看做常事(세인간주상사)
只管催呼夕食(지관최호석식)

<각주>

衚거리 호  1. 거리 2. 도시(都市)의 가로 

衕거리 동  1. 거리 2. 길거리 3. 설사하다(泄瀉--) 

絶끊을 절  1. 끊다 2. 단절하다(斷切ㆍ斷截--), 

                  숨이 끊어지다, 

句글귀 구,올가미 구,글귀 귀  

       1. 글귀, 문장(文章)의 단락(段落) 2. 구절(句節)

가슴으로 읽는 한시 일러스트

영조 말엽의 천재 시인이자 역관인 이언진(李彦瑱·1740~1766)의 시다. 

세상을 밝히던 해가 뉘엿뉘엿 떨어질 때면 시인은 통곡하고 싶어진다. 

모두들 배고프다며 밥을 내오라 재촉하는 시간이다. 

해가 져서 저녁밥을 찾는 그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일상을 시인은 왜 타박하는 걸까? 

시인 자신도 그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텐데 말이다.

시인이 해가 질 때면 통곡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저 떨어지는 해가 인생의 끝나는 순간을 날마다 보여주기 때문이리라. 

하루하루를 일상의 관성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시간의 귀함을, 그 상실의 아픔을 자각하지 못하겠지만 

시인은 민감하게 느낀다. 일몰은 시인에게 조금씩 몰락하는 인생의 슬픔을 알려준다. 

오늘도 해가 지니 오늘 하루의 이 귀한 시간이 사라지는 아픔에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