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Why? 2015.02.07 곽아람 기자)
'日문화유산답사기' 일본서 펴낸 유홍준 前문화재청장
베스트셀러 된 비결 싱싱한 구어체로
편하게 읽을 수 있게 써 문단선 '수다체'라 말해
비난 각오하고 쓴 책 아베 정부 들어서면서
일본서 혐한론 등장하자 서로 알아가자는 생각에
집필하기 시작
지난 3일 오후 서울 남가좌동에 있는 명지대 유홍준(66) 석좌 교수 연구실. 책장에 말라비틀어진 북어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저 북어 봤어요? 나무로 만든 북어잖아. 제사상에 맨날 진짜 북어 올리는 게 아니라,
저거 하나 갖고 '만년구짜'로 올려 먹는 거야. 인사동 고미술 가게에서 산 백 년쯤 된 물건이야.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배도 가르고 눈깔도 다 진짜인 것처럼 했잖아."
유홍준은 "북어를 걸어놓으면 복이 온다지 않나"며 웃었다.
유홍준은 명지대의 방 두 개를 서재와 연구실로 쓰고 있었다.
2만권쯤 된다는 장서와 함께 도자기며 그림이 곳곳에 놓인 풍경은 풍류를 즐기던 조선시대 선비의 사랑방이 재현된 것처럼
보였다.
180㎝의 큰 키, 광대뼈가 도드라져 엄격해 보이는 얼굴이 '달변가'라는 명성답게 일단 말을 시작하자 부드러워졌다.
유홍준은 강연이라도 하듯 쉴 틈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익히 알려진 대로 유홍준은 90년대 대한민국에 문화 유적 답사 열풍을 불러일으킨 주역이다.
그는 영남대 교수로 있던 1993년 5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인 '남도답사일번지'를 출간하며 일약 스타 작가가 됐다.
'아는 만큼 보인다'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같은 말을 유행시키며 잊고 있던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답사기 1권은 지금까지 모두 130만부 팔렸으며, 최근 교보문고가 집계한 90년대 종합 베스트셀러 3위에 올랐다.
2012년 인문서로서는 처음으로 1~6권이 300만부를 돌파하며 기록을 세웠고, 지금까지 1~7권 합쳐 모두 350만부가 팔렸다.
서로를 인정 안 하는 韓·日
일본, 고대史 콤플렉스로 역사 왜곡 일삼아
한국은 근대史 콤플렉스 日 문화를 무시해
兩國 간 민감한 이슈라…
한반도로부터 문명의 빛 갔다는 걸 분명히 하고
일본美 특질 공들여 연구
첫 답사기 발간 이후 20년, 그는 해외로 발을 뻗어나갔다. 2013년 7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을 펴냈다.
책은 지난해 11월 모두 네 권으로 마무리됐다. 책을 출간한 창비 관계자는 "네 권 합쳐 20만부가량 팔렸다"고 밝혔다.
책의 인기는 국내로만 그치지 않았다.
지난달 27일 일본의 유서 깊은 출판사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에서 1권 규슈편이 번역 출간됐고,
이달 말엔 2권 아스카·나라 편이 출간된다. 1권 띠지에 이런 문구가 적혔다.
"한국에서 한 집당 한 권씩 있는 대형 베스트셀러 시리즈의 일본편!"
일본 아사히(朝日) 신문은 지난 6일 '한국 학자, 일본을 걷다'라는 기사로 이 책의 일본어판 간행 소식을 알렸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지난 3일 학교 연구실에서 지금까지 출간한 저서를 무릎 위에 얹고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그는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며 “대중이 역사를 책으로만 이해하기보다 유물을 통한 문화사를 통해 이해하길 바라며 답사기를 썼다”고 했다. / 김지호 기자 |
- "문화 유산 통해 서로를 더 많이 알았으면"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 문제로 한·일 관계가 경색돼 있는 이 시점에,
이번 답사기는 한국이나 일본 어느 한 쪽의 문화가 우월하다고 외치는 책이 아니다.
1~3권에선 한반도와 일본 문화와의 관계를 짚었고, 4권 '교토의 명소'에선 일본미(美)를 집중 탐구했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만든 문화가 '일본 문화'라는 시각은 국수주의자들로부터 비난받을 소지가 있다.
"김연아한테 배웠다. 지난해 소치 동계올림픽 은메달은 김연아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일이다.
- 지난달 27일 일본에서 출간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 창비 제공
"나 자신만 해도 '교토의 불국사'인 청수사(淸水寺) 창건자가 백제계라는 것만 알고 애국적 관점에서 접근했었다.
유홍준의 일본답사기는 외래어 고유명사는 원지음(原地音)을 따라 표기한다는 국립국어원 규정을 따르지 않았다.
"한자를 전혀 모르는 세대에겐 '용안사'나 '료안지'나 똑같지만, 한자를 아는 사람에겐 '료안지'보다 '용안사'가 입에 붙고
무료로 연재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007년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에서 당시 문화재청장이었던 유홍준의 은행 예금이 화제가 됐다.
―마흔 다섯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평론집 제외하고 대중서로서는 '첫 책'인 셈인데 기분이 어땠나.
"기분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없었다. 강연 요청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왔다.
―왜 그렇게 잘 팔렸을까.
"친절하고 쉽게 우리 문화유산에 대해 가르쳐주는 책이 없었던 거다.
―어떻게 해서 그 책을 쓰게 됐나.
"1991년 친구들과 함께 월간 '사회평론'을 창간했다.
―문화유산을 다룬 책은 보통 '물건'이 주인공인데, 유홍준의 책은 필자가 주인공 같다.
"사람들이 편히 읽을 수 있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학계에선 학자가 공부는 안 하고 대중적 인기만 누리려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런 시각이 있을 수도 있다.
유홍준은 일본 답사기에 '중용(中庸)'의 한 구절을 인용해 이렇게 썼다.
"어떤 사람은 나면서부터 알고, 어떤 사람은 배워서 알며, 어떤 사람은 노력해서 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나는 노력해서 아는 거지.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보면 모르나?
- 유홍준은 “일본 답사기를 쓰기 위해 지난 2년간 3박4일씩 일본을 열두 번
- 다녀왔다”며 “앞으로 시간이 허락한다면 연암 박지원 등 조선시대 때
- 청나라에 파견된 연행사(燕行使)들의 발자취를 밟아가는
- 중국 기행을 써보고 싶다”고 했다. / 김지호 기자
숭례문 화재는 시스템 문제
국보 1호가 불탔는데 문화재청장이 가만있으면
안되는게 대한민국 정서 빨리 떠나는게 상책이었다
유홍준은 1949년 서울에서 2남 4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왜 미술사로 전공을 바꿨나.
"김윤수 전(前) 국립현대미술관장의 '미술사의 철학' 강의를 들은 게 계기가 됐다.
―삼선개헌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1974년에 수감돼 11개월간 옥에 있었다. 어떤 경험이었나.
"별건 없었다. 80년대 학생운동하고는 달리 조직도 없었고, 당시엔 양심적인 지식인의 자기 선언 같은 거였다.
"교수 임용되기 前 7년 백수생활… '답사기' 쓰는 자양분 됐다"
베스트셀러 된 비결, 싱싱한 구어체로
편하게 읽을 수 있게 써 문단선 '수다체'라 말해
"그때 치사하게 복학을 안 시켜주더라.
유홍준은 1980년에 복학했고,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에 당선됐다.
'답사기'의 인기는 '야인(野人)' 유홍준을 '주류(主流) 세계'로 불러들였다.
―당시 가장 유력한 국립중앙박물관장 후보로 꼽혔는데 결국 후보에서 사퇴했다.
"인터넷에 사전 내정설이 돌면서 시끄러워지자 정부에서 나더러 거기 가지 말고 문화재청장을 차관급으로 격상시킬 테니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으로 문화재청장이 된 건가.
"노 전 대통령을 그전에 만난 적은 없다. 그분이 독서 인사(人事)를 하는 분 아닌가.
―문화재청장 하면서 남다르게 했다고 생각하나.
"재미있게 했다. 원 없이 했다.
―문화재청장 시절인 2008년 2월 숭례문이 불에 탔는데.
"난감했다. 그건 시스템이 잘못됐던 거다.
―그래서 결국 책임지고 물러난 거 아닌가.
"예를 들어 보자. 강릉객사문이 불탔다고 하면, 강릉 시장 책임인가, 문화재청장 책임인가.
세 시간가량 마주앉아 있는 동안 유홍준은 시종일관 당당했고 자신감에 넘쳤으며 한 번 한 말을 거두지 않았다.
문화재청장 시절 그는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과 각료들을 붙임성 좋은 갯과(科)와 친화력 부족한 고양잇과로 나누어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괴상한 아이지. 진기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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