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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탈리 칼럼] 유럽의 루스벨트가 필요하다

바람아님 2016. 11. 19. 23:43
중앙일보 2016.11.19 01:02

국민투표나 선거, 대중 시위에서 드러나는 국민들의 메시지는 날이 갈수록 더 확연해지고 있다. 국민들은 현 지배계층의 교체를 원한다.

국민들은 저 지배계층이라는 사람들이 의무를 다하지 않고, 공익을 위해 복무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국민들은 새로운 지배계층이 나와 일자리를 제공하고, 공동체 의식을 재건하며, 국가적 이상에 대한 믿음을 회복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국민들의 지배계층 교체 열망은 크나큰 희생을 치르고서야 쟁취한 인종차별 철폐와 같은 인권, 파리 기후변화협약 같은 중요한 국제적 합의, 전쟁이나 비참함으로부터 탈출해 나온 난민 수용처럼, 국외에서 발생하는 고통스러운 일에 대한 일체의 관용을 다시 논의해야 한다는 값비싼 대가를 감수할 정도로 거세다.


우리는 같은 상황을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적어도 두 번 겪었다. 18세기 말 유럽에서는 프랑스혁명과 공포정치, 나폴레옹전쟁이 있었고, 20세기 초반에는 1929년 세계 대공황 이후 유럽과 아시아에서 파시즘이 대두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두 번의 사례에서 지배계층 교체와 국가적 이상 회복은 혁명과 살육, 독재와 전쟁이라는 매우 난폭한 충돌에 의해 진행됐다. 이 충돌들은 회를 거듭하며 더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고, 그때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인본주의적 가치를 훼손했다.

이 사례들에서 보자면, 그러니까 약 30년에 걸친 끔찍한 시대에서 벗어나던 무렵, 세계는 새로운 성장 모델을 발판으로 더 개방적이고, 더 민주적인 방향으로 거의 안정을 찾았다. 새 성장 모델의 이론과 실제가 가장 엄혹했던 시대의 독재 한가운데에서 싹을 틔웠던 것이다.

실제로 매번, 훗날 사회 모델의 근간을 형성하게 될 것들은 그 끔찍했던 수십 년을 거치는 동안, 우선은 거친 풍자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니까 사실 새로운 유토피아는 바로 그 시기에 독재자에게 부역하던 이들과 그들에게 대항하던 이들에 의해 건설되고 있었던 셈이다.


예를 들어 2차 대전 종식 이래 서방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 모델(강력한 국가, 공공 투자, 가족 지원 정책)은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에서 사회 풍자 형식을 빌려 출발을 알렸다. 사회민주주의 모델은 이후 레닌의 신경제정책 속에서, 그 다음에는 히틀러의 독일에서 전체주의 버전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모델은 미국의 플랭클린 루스벨트 시대에 가서야 민주주의 내에 자리를 잡고, 이후 영국과 프랑스 및 여타 나라들에 정착했다.


오늘날 미국으로 가 보자. 웬 파렴치한 거짓말쟁이가 금융계와 정·재계 엘리트들을 쓸어내 버렸다. 쫓겨난 엘리트들은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지난 수십 년간 사회 계층 간, 지역 간 수입의 공정한 분배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공익과는 관계 없는 검은 로비 세력과 정치 공작의 손 안에서 헤매다 버니 샌더스 같은 최고 후보자들의 길을 막았다. 가히 스스로 발등을 찍었다 할 만하다.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으로 우선 미국에서 수립될 경제 모델은 국경 폐쇄, 공공 인프라 투자 확대, 대폭적인 세금 축소 등으로 실현될 것이다.


이 모델에 이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합리적인 방식으로 운영된다면 미국 경제성장의 재분배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 또한 유럽은 이를 본받아 유럽 공동 관세를 정비하고 대규모 인프라 건설 사업을 출범시켜야 할 것이다. 미국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탈퇴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운명에 몸을 내맡겨야 하는 처지가 되면, 유럽도 결국에는 공동 안보 체제를 갖추고 러시아와 합의를 끌어내야 한다는 압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델은 지난 독재의 세기에 그랬듯, 지속 가능한 사회를 수립하기에는 미진할 것이다. 그 시대의 독재자들은 영토 확장에서 구원을 찾아보려 나섰다가 종국에는 그로써 체제의 몰락을 빚고 말았다.

트럼프가 제창하는 경제 모델은 사실은 개방적이고, 타인을 배려하며,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사회에서만 오직 지속 가능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트럼프는 무솔리니다.


역사에서 배우고, 레닌이나 히틀러의 망령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일 없이 바로 새로운 루스벨트를 향해 가는 일은 우리들의 몫이다.


자크 아탈리
아탈리 에 아소시에 대표
플래닛 파이낸스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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