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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본 한국영화 100년] ③ 우리 기술 첫 컬러영화는 1949년 개봉 '여성일기'

바람아님 2019. 12. 29. 08:31
뉴시스 2019-11-29 11:47:52

조선 최초 컬러영화 '무궁화동산', 1949년 3·1절 경축기념 개봉
'여성일기'는 25세 홍성기 감독이 16mm로 제작...5만명 관람
비싼 필름값-현상소 부족 탓, 1960년대 말에야 보편화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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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에드워드 터너가 찍은 세계 최초의 천연색영화 (사진=텔레그래프 누리집 캡처) 2019.11.28 photo@newsis.com

※ 뉴시스는 2019년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아 [최초로 본 한국영화 100년]을 특별기획했다.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의 원형 추적기를 시작으로 △ 최초의 영화스타 변사 △ 최초의 총천연색 영화 △ 최초의 국제영화제 수상작 등 최초의 기록들을 심도 있게 추적해 한국영화 100년사를 실감있게 재구성할 것이다.

'천연색 영화'는 자연의 색을 거의 그대로 화면에 나타낸 영화를 뜻한다. '색채 영화', '시네마 컬러', '총천연색 영화'라는 말로도 불리는데, 쉽게 말해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컬러 영화'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기사에서는 이해를 위해 컬러 영화라는 용어로 통일해 사용하겠다.

초기 컬러 영화를 만드는 방식은 염색이나 착색과 같은 물리적인 방식이었다. 광학적 방법을 이용한 컬러 영화 중 키네마컬러(Kinemacolor)가 가장 먼저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그만큼 오랫동안 세계 최초의 컬러영화 기술은 영국의 '키네마컬러(Kinemacolor)' 시스템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기술은 1906년 특허획득 후 상용화됐고,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이 뒤를 이은 기술은 '테크니컬러(Technicolor)'였다. 1916년 첫선을 보인 후, 1922년부터 1952년까지 할리우드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된 제작방식이다.

하지만 2012년 이보다 더 앞선 기록이 등장한다. 영국의 무명 사진작각 에드워드 터너는 키네마컬러보다 4년 빠른 1902년에 컬러 동영상을 찍는 방법의 특허를 보유했다. 그는 런던 거리와 마코 앵무새, 자신의 세자녀가 집안 뒤뜰에서 금붕어와 노는 모습 등을 영상에 담았다.

터너가 1903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숨지자, 빨강, 초롱, 파랑의 필터를 통해 연속적인 프레임을 만든 후 겹쳐서 촬영하는 터너의 방식은 영상이 흐릿하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후 잊혀졌다. 하지만 터너의 영화 필름은 그를 재정지원한 영화 선구자 찰스 어반의 자료에 포함돼 있었고, 1937년 영국 과학박물관이 확보해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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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영화 '무궁화동산' (사진=한국영상자료원 제공) 2019.11.28 photo@newsis.com

◇ 조선 최초의 컬러 영화: 안철영의 '무궁화동산'

한국 최초의 천연색영화 '무궁화동산'은 하와이 동포의 생활, 역사 등을 고국에 있는 동포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만든 기행 영화다. 당시 신문기사와 광고에서 이 영화는 '기록영화', '문화영화', '과학적 영화', 하와이 동포의 생활 수록영화', '풍물시' 등으로 소개됐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이 작품을 '세계의 낙원' 하와이에 모여살고 있는 우리 교포들의 생활상을 기록한 영화라고 소개한다. 제목 '무궁화동산'은 무궁화가 365일 만발한 하와이를 의미하는데, 대한민국 국화와 연결되면서 하와이를 대한민국의 청사진을 위한 모델로 제시한다.

한국 최초의 천연색영화는 안창호 목사의 4녀1남 중 막내인 안철영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당시 대표적인 영화인 중 1명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전수대학 예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사진화학과를 수학 후 라이만발성영화연구소에서 영화를 연구했다. 귀국 후 돌아온 후에는 서병각, 최영수 등과 함께 극광영화제작소를 설립했고, 창립 제1회 작품으로 '어화'(1938)를 제작, 감독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 시기 문교부 예술과장을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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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안철영 감독 (사진=한국영상자료원 제공) 2019.11.28 photo@newsis.com


문교부 예술과장으로 재직하면서 동시에 서울영화주식회사에 프로듀서로 관여했다. 그는 1947년 9월 조선 최초의 예술 사절로 미국영화계를 시찰할 기회를 얻어 아버지 안창호 목사가 활동하고 있는 하와이를 거쳐 할리우드를 방문한다. 이때 '무궁화동산'을 제작했다.

그는 1948년 7월 귀국해 9월께 대한민국 문교부 예술과장을 사직하고 서울영화주식회사 일에 전념한다. '무궁화동산'은 중앙영화배급사와의 갈등을 겪은 후 1949년 3월에 문교부 추천의 3·1절 경축기념영화로 개봉했다.

그가 이 작품을 만들고자 했던 이유는 두 가지로 추정된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지난 50년간 하와이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하와이 동포들을 국내에 소개하려는 목적이 첫 번째였다.

두 번째는 컬러영화를 구현하고자 하는 욕심이었다. 천연색영화가 미래 영화의 대안이 될 것인가에 대해 세계 영화계의 논의가 분분한 가운데, 미국에서는 천연색영화가 대중에게 환영받을 것이라는 전망 하에 이미 1930년대부터 천연색영화가 제작되고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백설공주'(1937),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등이 헐리우드에서 1930년대에 제작된 대표적인 컬러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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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영화 '무궁화동산' (사진=한국영상자료원 제공) 2019.11.28 photo@newsis.com

영화 감독이자 행정가로서 일본과 독일 유학을 통해 영화기술의 과학화, 선진화를 목도한 그가 늘 숙원했던 바는 선진 모델 습득을 통한 '조선영화의 과학화·선진화'였다. 결국 그가 이 여행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조선 영화계에 '과학 기술을 기반으로 한 영화 체계'를 앞당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천연색영화는 테크니컬러가, 16mm는 코닥과 엔스코가 독점하고 있었고, 현상은 코닥의 독점사업이었다. 19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미일 관계는 점점 악화됐고, 아직 천연색영화와 관련한 그 어떤 기술도 보유하지 못한 일본은 미국만의 독점사업인 컬러 영화에 대해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만큼 해방 전에는 일본의 부정적 태도로 해방 후에는 자재난으로 조선에서는 컬러 영화는 꿈같은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컬러 영화의 구현은 순전히 미국 여행 덕분에 가능했다. 당시 컬러 필름을 구하는 것도 미국을 통해서만 가능했고, 행여 구한다하더라도 현상이나 인화를 할 수 있는 그 어떤 기술력도 없었기 때문에 이를 위해 필름을 미국에 보내야 했다. 그만큼 컬러 영화를 욕망했던 안철영에게 미국여행은 아주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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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영화 '무궁화동산' (사진=한국영상자료원 제공) 2019.11.28 photo@newsis.com

다만, 이 영화는 해외에서 촬영됐고, 기자재도 해외에서 임대해 촬영된 데다가 촬영과 후반작업이 온전히 조선영화인의 손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는 한계가 있다.

서울영화주식회사가 제작했지만, 제작 조선인 스태프가 촬영에 임할 수 없는 불가피한 해외 로케이션 촬영 상황이라 해외 촬영자를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 조선에서 컬러 영화를 인화 현상할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아예 녹음까지의 후반작업을 미국에서 완료해 올 수밖에 없었다.

◇ 우리 기술로 만든 최초의 컬러 영화: 홍성기 감독의 '여성일기'

'여성일기'의 광고를 보면 "우리영화사상 최초로 우리의 손으로 제작된 총천연색 극영화"라는 문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우리 민족의 자랑이요 우리 겨레의 꽃이 피었다. 세계영화계에 진출할 미려한 색채영화!!"라는 문구에서도 추론할 수 있듯이, 같은해 개봉한 '무궁화동산'을 겨냥해 차별성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일기'는 조선인의 참여와 기술로 만들어진 새로운 색채영화로서 최초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여성일기'는 영화 기술을 지닌 인력이 드물었던 환경에서 홍성기 감독이 25세의 나이로 당대 기술 인력을 결집해 16mm 필름으로 만든 컬러 영화다.

'여성일기'는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헌신해 온 황온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이다. '사랑의 길을 포기하고 사회사업에 전념하는 한국보육원 설립자 황온순의 일대기'를 그린다.

황온순은 6·25전쟁 이후 전쟁고아들을 제주농고에 수용하면서 한국보육원을 설립, 전쟁고아의 아버지 헤스대령의 참전기를 영화화한 '전송가'(1957, 더글러스 서크)를 통해 '전쟁 고아의 어머니'로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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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영화 '여성일기'의 제작진과 배우들. 앞줄 배우 황정순(앞줄 오른쪽), 주증녀(앞줄 왼쪽)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한국영상자료원 제공) 2019.11.28 photo@newsis.com

줄거리는 이렇다. 황온순(주증녀)는 친구의 오빠(송재로)를 사랑하지만, 그에게 본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크게 실망한다. 그 결과 자신이 살아 온 세상과 단절하고 사회사업에 전념할 것을 결심한다. 주인공은 여자의 손으로 보육원을 경영해 나간다는 것이 그리 용이하지 않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굽힐 줄 모르는 의지로 육영사업을 성공으로 이끈다. 전라북도 이리에서 '보화원'이란 탁아소를 연 것을 필두로 해방 직후에는 서울역에서 구호소를 열어 일제 징용에서 돌아온 젊은이들을 돕는다.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에서 연출부로 일하던 홍성기 감독과 미술부에서 일하던 신상옥 감독이 1961년 '춘향전'과 '성춘향'으로 라이벌 관계를 이루며 자존심을 내건 한판 대결을 펼치기 이전 시기에 함께 만든 영화다.

당대 대중의 감수성에 충실한 멜로드라마로 전후의 혼란 속에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홍성기 감독과 미쟝센의 달인인 신상옥이 미술을 담당한 이 영화는 서울 수도극장에서 휴일을 기해 상영됐는데 다소 계몽적 성격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성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홍성기가 연출한 여러 편의 멜로드라마에서 주로 작업한 함완섭이 조명을, '미몽'(1936) 연출 이후 편집과 녹음전문가로 활동하던 양주남이 음향을 맡은 기대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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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여성일기'를 연출한 홍성기 감독 (사진=한국영상자료원 제공) 2019.11.28 photo@newsis.com


리버설 필름(슬라이드 필름) 중 코다크롬으로 촬영을 했으나 현상상태가 좋지 않아 선명한 색을 재현해 내지 못했고, 녹음도 불완전했다. 이러한 결함으로 1주일 상영에 그쳤지만, 영화는 성공적이었다. 서울 수도극장에서 1949년 4월9일 개봉했는데, 당시로서는 꽤 많은 숫자인 5만명의 관객이 몰렸다. 

아쉽게도 '여성일기'는 필름으로 보존돼 있지 않다.

국내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컬러 영화는 홍성기 감독의 '여성일기'(1949, 필름 유실)로 기록되지만, 다큐멘터리와 문화영화로 범위를 확대할 때 국내 최초의 컬러영화는 '무궁화동산'이다.

자국의 자본과 제작진으로 완성한 '여성일기'와 비교한다면, '무궁화동산'은 일본계 미국인에 의해 촬영됐다. 한편 1960년대 중반 이전까지 국내에는 컬러 필름을 현상할 수 있는 곳이 없었고, 따라서 이 시기의 컬러 필름들은 현상을 위해 일본이나 미국으로 보내졌다. '무궁화동산' 역시 미국에서 현상되고 완성됐다.

이처럼 1947년 '무궁화동산'을 위시한 컬러 영화 제작이 시작됐지만, 컬러 필름의 높은 가격 부담과 컬러 현상소의 부족 탓에 본격적인 컬러 영화 제작은 1960년대 말이 돼서야 이루어졌다.

[서울=뉴시스] 남정현 기자
◎공감언론 뉴시스 nam_jh@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