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詩와 文學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99>폐선에 기대어

바람아님 2014. 10. 21. 20:22

 

 

폐선에 기대어
―남진우(1960∼)

이른 아침 눈뜨면
머리맡에 배 한 척 밀려와 출렁이고 있네
찢긴돛폭사이말간햇살들바삭거리며부서져내리고있네

그 배 문가에 기대어 놓고
바람이 부는 쪽으로 한없이 걸어가
하루 종일 이 일 저 일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오면
어디론가 가고 없는 배

잠들기 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종이를 접어 배를 만드네
한 척 두 척 내 손을 떠난 배는
내 방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떠나가고
험한 물살에 시달리다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버리고

다시 누워서 눈을 감으면
이 밤도 저 멀리서 흔들리며 다가오는 배가 보이네
물살에 실려 그 배는 이리저리 떠돌다
잠에서 깰 무렵이면 어느덧 내 머리맡에 와 있네

배를 얻고 잃기를 되풀이하며
매일 낮 매일 밤 나 세상을 떠돌았네
닿을 길 없는 부두를 찾아 덧없이 헤매 다녔네

어느덧 늙고 지친 내가 눈을 뜨면
어김없이 머리맡에 와 나를 굽어보고 있는 낡은 배 한 척
부서진 뱃전에 머리 기대고
나 다시 떠나야 할 하루의 먼 길을 헤아려보네


내 얘기네….” 이 시의 설득력 있는 쉬운 은유에 동감할 직장인이 많을 것이다. 이른 아침 일어나서 출근하고, ‘하루 종일 이 일 저 일에 시달리다’ 폭삭 지쳐서 집에 돌아오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 보니 어느새 노년! 대다수 현대인의 삶이다. 그중 어떤 이는 간간, 잠들기 직전이나 잠에서 막 깼을 때, 까마득히 잊었던 젊은 날의 꿈이 찰랑거리며 밀려와 가슴이 아리기도 할 테다. 그런 때가 있었지. 훤칠한 돛을 올리고 꿈을 향해 늠름하게 떠날 참인 새 배 같았던 나! 그런데, 여기가 어딘가요,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한 채, 이제는 아무 지향도 없이 용골 삭은 배가 되었구나.

화자는 어영부영하다가 이렇게 된 게 아니다.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걸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세파에 시달리고, 그때마다 배도 흔들려 마모됐단다. 자아의 투영이며 자아실현의 꿈인 배. 그 배는 화자가 현실을 버텨나가게 하는 힘이 돼 주기도 하지만, 배 때문에 그와 현실의 관계는 차가운 미지근함으로 어딘지 외롭다. 화자의 몸은 현실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다른 곳을 떠돈다. 그의 얼굴에는 그 다른 곳의 그림자가 어룽거린다. 폐선, 낡아버린 꿈의 유령이.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