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他/배명복칼럼

[배명복 칼럼] 자화자찬 한국 외교

바람아님 2015. 3. 31. 10:52

[중앙일보] 입력 2015.03.31

배명복/논설위원·순회특파원

지난주 뉴욕타임스의 국제판인 인터내셔널 뉴욕타임스 오피니언면에 눈길을 끄는 만평이 실렸다. 한국 지도가 그려진 도박판에서 미국과 중국 지도자가 각각 판돈을 거는 그림이다. 중국은 현금 뭉치를, 미국은 미사일을 판돈으로 밀어넣고 있다(그림① 참조). 군사력을 앞세운 미국과 경제력을 앞세운 중국이 한국에서 벌이고 있는 세력 다툼을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을 다녀간 지난해 7월 초, 중국 인터넷 매체에 실린 만평은 노골적이다 못해 외설적이다. 버락 오마바 미 대통령 및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한 이불을 덮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옆 침대의 시 주석이 돈을 보여주며 추파를 던지고 있다. 시 주석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박 대통령의 팔을 붙잡은 오바마와 아베의 눈길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구한말 이래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은 서구 언론 만평의 단골 소재였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프랑스 신문에는 한국이라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일본과 중국이 낚시질하는 그림이 실렸다. 1905년 러일전쟁 때 조선은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잡아당기는 줄에 묶여 비명을 지르는 가련한 신세로 묘사되기도 했다(그림② 참조). 강대국 사이에 끼인 한국의 처지가 해외 언론의 만평 소재로 다시 등장한 느낌이다.

 100여 년 전 조선과 지금의 한국은 다르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약소국이 아니라 세계 15위의 경제력을 지닌 당당한 중견국이다. 하지만 대륙과 해양의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조건은 달라진 게 없다. 강대국 사이에서 나라의 운명과 진로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외교안보가 더없이 중요한 이유다. 경제는 실수해도 만회할 기회가 있지만 외교안보는 그렇지가 않다. 한번 삐끗하면 국운이 나락에 빠질 수 있다.

 윤병세 외교장관이 어제 서울에서 열린 공관장회의에서 박근혜 정부 외교정책의 호위무사를 자임했다. 일각의 비판적 시각에 대한 반박도 잊지 않았다. 그는 “외교 사안의 고차방정식을 1·2차원적으로 단순하게 바라보는 태도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며 “고뇌가 없는 무책임한 비판에 신경 쓰지 말고 뚜벅뚜벅 갈 길을 가면 된다”고 했다. 외교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단순무식한 소음 정도로 치부해버린 셈이다.

 그는 “19세기적 사고방식으로 마치 우리나라가 여전히 고래싸움의 새우 또는 샌드위치 신세인 것처럼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며 이를 패배주의적·자기비하적·사대주의적 시각으로 일축했다. 오히려 그는 미·중 사이에 끼인 우리 처지가 양측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축복의 상황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지난주 한국이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참여를 선언한 것을 ‘최적의 절묘한 시점’에 가입 결정을 함으로써 고난도 외교력을 발휘한 대표적 사례라고 자찬했다. 영국·독일·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의 AIIB 참여 결정 덕에 덩달아 앓던 이를 뽑았다는 얘기는 쏙 뺐다.

 미국이 추진하는 고고도미사일방어(사드) 체계 참여 문제야말로 미·중 사이에서 고도의 전략적 판단이 요구되는 문제다. 윤 장관 말대로 미·중 사이에 끼인 우리의 처지가 축복이라면 왜 그걸 이용해 북한 핵 문제 해결에 진전을 이루지 못했는지 궁금하다. 사드 논란도 결국은 북핵 문제에 진전이 없기 때문 아닌가. 북핵 문제는 물론이고 남북 및 한·일 관계가 한 발짝도 앞으로 못 나아가고 있는데도 외교에 문제가 없다니 어안이 벙벙하다. 숲보다는 나무를 보는 것이 윤병세 외교의 취약점이다.

 지금 사드를 논하는 것은 시험도 보기 전에 합격·불합격을 따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드 체제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미국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천문학적 비용에 비해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많다. 북핵 문제의 진전 노력과 함께 사드의 실효성에 대한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검토가 우선이다.

 박근혜 정부 외교안보팀에는 팀워크란 게 없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해서도 관계부처 장관들 간에 제대로 된 토론 한 번 없었다고 한다. 그 중심에 서야 할 사람은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다. 국제정세부터 한반도 상황까지 현재와 미래의 전체 국면을 보는 매와 벌레의 눈을 갖고, 중책을 담당해야 할 사람이 국가안보실장이다. 그런 그릇을 갖춘 사람이 그 자리를 맡아야 한다. 국방부, 외교부, 통일부, 국정원이 부처 또는 개인 이기주의에 빠져 따로 논다는 말이 나와서는 안 된다. 박근혜 정부는 포장이 아닌 알맹이로 외교적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자랑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사설] 듣고 있자니 민망한 윤병세 장관의 자화자찬 外交

조선일보 2015-3-31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30일 최근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의 주한미군 배치 및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결정 등과 관련해 한국 외교를 향해 쏟아진 각종 비판에 대해 직접 반박하고 나섰다. 윤 장관은 이날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재외공관장 회의 개막 연설에서 "고뇌가 없는 무책임한 비판에 신경 쓸 필요가 없으며 뚜벅뚜벅 갈 길을 가면 된다"며 "고난도(高難度) 외교 사안, 고차방정식을 1차원이나 2차원적으로 단순하게 바라보는 태도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일각에서 19세기적 또는 냉전적 사고방식으로 우리나라를 여전히 고래 싸움의 새우 또는 샌드위치 신세같이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면서 "이런 패배주의적, 자기 비하적, 심지어 사대주의적 시각에서 우리 역량과 잠재력을 외면하는 것에 대해 의연하고 당당하게 우리 입장을 설명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날 회의에는 전 세계에 주재하는 대사 및 총영사 170여명이 참석했다. 외교 수장(首長)으로서 일선 공관장들을 격려하고 외교 과제를 알리는 자리가 공관장 회의다. 윤 장관은 이날 한국 외교에 대한 비판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일축하면서 연설의 대부분을 지난 2년여의 업적에 대한 자화자찬에 할애했다. 윤 장관은 "양자(兩者) 외교로부터 지역 외교, 글로벌 외교까지 대한민국의 전략적 위상과 존재감은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으며 한·미, 한·중 관계를 역대 최상의 수준으로 만들었다"며 "우리 다자(多者) 외교와 국제회의 외교도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했다. 한국 외교가 국민 모르게 언제 이런 엄청난 성과를 일궈냈는지 궁금할 뿐이다. 한·미 관계가 최상의 상태에서 순항 중이라는 윤 장관의 주장 역시 최근의 흐름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윤 장관은 한국이 AIIB 창립 회원국 신청 마감 직전에 가입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도 "최적(最適)의 절묘한 시점에 AIIB 가입 결정을 내림으로써 국익을 극대화했고 모든 이해관계자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외견상 드러난 모습을 놓고 보면 한국은 미·중(美中)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주요 국가의 참여 결정이 이뤄지자 부랴부랴 막차를 탄 쪽에 가깝다. 이 때문에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선 한국이 AIIB에서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한 사전 준비가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윤 장관은 "AIIB 결정은 고난도 외교력이 발휘된 대표적 사례"라고 자평(自評)했다.

윤 장관은 이날 "국익(國益)의 관점에서 우리가 옳다고 최종 판단되면 분명히 중심을 잡고 균형 감각을 갖고 휘둘리지 말고 밀고 나가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조건은 "딜레마가 아니라 축복(祝福)"이라고도 했다. 사실 국민이 한국 외교에 바라는 것이 바로 이런 자세다. 그러나 우리 외교는 사드 등 어려운 결정과 맞닥뜨리면 '전략적 모호성' 같은 단어를 대놓고 입에 올리면서 주변 강국의 눈치 보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 왔다. 윤 장관의 이날 연설에 공감할 국민이 얼마나 되며, 지금이 이럴 때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