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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한국 처녀귀신, 이집트 미라…원한은 귀신을 낳는다

바람아님 2015. 7. 5. 10:18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5.07.05

납량특집 - 세계의 귀신 이야기

9일간의 여왕이었던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초상.


여름입니다. 열대야를 시원하게 보내려면 무서운 이야기가 최고죠. 귀신과 유령, 요괴와 미라가 나오는 만화나 영화, 이야기들은 빙수처럼 짜릿하고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여러분은 귀신도 국적(?)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저승세계엔 국경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귀신은 공통점이 많다기보다 그 나라만의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 그 나라에는 그 귀신이 살고 있는 걸까요. 나라별 귀신의 특성과 그 뒤에 숨겨진 사회적 배경을 찾아봤습니다.

프랑스의 화가 드라로슈의 작품인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 중 일부.


영국 레이디 제인 그레이 유럽에는 유령 전설이 있는 오래된 성이 많다. 『해리 포터』를 보면 각 기숙사마다 유령이 하나씩 있을 정도다. 래번클로 기숙사의 유령인 ‘회색 숙녀(Grey Lady)’는 영국 런던탑의 유령인 ‘레이디 제인 그레이(Lady Jane Grey)’가 모델이다. 1553년,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한 후 그의 5촌 조카인 제인 그레이는 주위 세력에 떠받들여져 여왕이 된다. 에드워드의 친누나인 메리 여왕이 즉위하기까지 단 9일뿐이었지만. 다음 해 2월 12일, 제인 그레이는 갇혀있던 런던탑에서 처형당했다. 지금도 매년 처형당한 날이면 하얀 옷을 입은 그의 유령이 런던탑에 나타난다고 한다. 정복왕 윌리엄이 1078년에 세운 성채인 런던탑은 왕족·귀족의 감옥과 처형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유명인 유령을 목격담이 종종 나온다. 삼촌인 리처드 3세에게 왕위를 빼앗긴 에드워드 5세와 동생 요크 공작의 유령도 자주 나타난다. 런던탑에 갇혔던 형제는 1483년 경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친척 어른들의 정치 욕심에 희생당한 이들의 나이는 사망 당시 레이디 제인 그레이 17세, 에드워드 5세는 겨우 12세였다. 이들 유령 전설의 바탕에는 피비린내 나는 역사에 희생된 약자에 대한 동정,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민중들의 죄책감이 있다.

일본의 오니바바 이야기는 신분 질서 아래 억눌린 민중의 정서를 반영한다.


일본 오니바바 이웃나라 일본의 마귀할멈은 ‘오니바바’라고 부른다. 지역마다 오니바바 이야기가 있는데 후쿠시마현에 전해지는 ‘아다치가하라의 오니바바’가 가장 유명하다. 오니바바는 나그네를 잡아먹는 요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겨우 지역간 이동을 금하고 태어난 곳의 영주들에게 충성하라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인가 싶어 시시해진다. 그런데 오니바바의 내력을 알면 숨은 주제가 보인다. 오니바바는 교토 귀족 집안에서 유모로 일했다. 원래 이름은 이와테였다. 모시던 아가씨가 병에 걸려 태아의 생간을 먹어야 낫는다는 처방을 받자 이와테는 임산부를 찾아 나섰다. 아다치가하라에 이르러 집을 짓고 길 가는 임산부를 기다렸다. 15년이 지나 드디어 만삭의 임산부가 이와테의 집에 머물렀다. 이와테는 임산부를 죽이고 태아의 생간을 꺼냈다. 그런데 임산부의 품 안에 눈에 익은 부적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교토를 떠날 때 딸에게 준 부적이었다. 충격을 받은 이와테는 죽지도 않고 살아있는 상태로 귀신이 되었다. 결국 오니바바 이야기는 지배자들에게 충성해봤자 아무 의미 없고 자신만 손해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일본에는 이렇듯 알고 보면 엄격한 신분질서 아래 오랫동안 억눌렸던 민중의 정서를 반영하는 요괴 이야기가 많다. 궁금하면 우물에서 접시 세는 귀신 이야기를 한번 찾아보시라.

백사전과 비슷한 중국 설화를 영화화한 `천녀유혼`의 배우 왕쭈셴(王祖賢).


중국 백사전 이번에는 중국으로 가볼까. 중국에는 요괴가 미녀로 변해 순진한 청년을 유혹하는 이야기가 많다. 대개 남자가 기를 빨려 죽기 전에 도사가 구해준다. 이런 유형의 이야기는 ‘천녀유혼’ ‘청사’ 등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영화 ‘청사’의 원작은 항저우 지방에 전해지는 ‘백사전’이다. 천년 묵은 흰 뱀 백소정은 선비 허선과 사랑에 빠진다. 금산사의 법해법사는 백소정의 정체를 알고 허선을 구하려 한다. 백소정은 목숨을 걸고 법사와 싸워 사랑을 지킨다. 결국 허선은 백소정의 정체를 알고도 그의 진심을 받아들인다. 가만 보면 서로 다른 처지의 연인들이 사랑을 방해하는 자에게 저항하며 사랑을 지키는 이야기다. 옛날에는 자신과 다른 계급이나 집단에 속한 상대와의 사랑이 금지되었다. 기생의 딸 춘향이의 사랑도, 원수 집안의 딸 줄리엣의 사랑도 금지되지 않았는가. 사회가, 기성세대가 반대하는 사랑에 빠진 자에게는 상대가 사람이든 뱀이든 요괴든 별 차이 없는 셈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닌 요괴가 사랑을 지키기 위해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법사와 대결하는 이야기는 약자의 사랑할 권리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의 처녀귀신은 사람을 해치는 대신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하소연하기 위해 나타난다.

 

한국 처녀귀신 우리나라의 귀신으로는 소복 입은 처녀귀신이 유명하다. 우리나라 처녀귀신들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기 위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울함이 풀리면 인사하고 조용히 사라진다. 대표적인 처녀귀신 이야기로는 ‘장화홍련전’이 있다. 평안도 철산에 살던 배좌수는 장화홍련 자매를 두고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허씨에게 새 장가를 든다. 계모 허씨는 장화에게 누명을 씌워 연못에 빠져 죽게 만든다. 이 사실을 안 홍련은 그 연못에 찾아가 자살한다. 귀신이 된 자매는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철산부사를 찾아가지만 다들 놀라 죽는다. 그러던 중, 정동우라는 사람이 철산부사로 자원해 와서 귀신 자매의 하소연을 듣고 자매의 한을 풀어준다. 장화홍련 자매는 돌봐줄 친엄마가 없는 가정 내의 약자였다. 친아버지 배좌수는 자매를 보호하지도, 계모 허씨의 악행을 말리지도 않았다. 결국 처녀귀신 이야기는 가정 내의 약자인 소녀들이 죽은 후 귀신이 되어 자신이 당한 억압을 고발하는 이야기다. 지금은 비록 우리가 힘이 없어 당하지만, 죽은 후에라도 반드시 복수할 테니 당장 악행을 중지하라는 약자의 저항, 경고를 담고 있다. 그러니 혹시 귀신을 만나더라도 절대 당황하지 말고 귀 기울여 사연을 들어 볼 일이다.

이집트 미라는 공포영화의 단골 소재다.

 

이집트 미라 약자의 저항과 경고가 담긴 무서운 이야기라고 하면 이집트의 미라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공포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미라는 대개 서구 제국주의 침략기인 19~20세기 초반에 이집트에서 서구의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미라가 된 죽은 이의 안식을 방해하는 도굴꾼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한다. 1922년 발굴된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유래한 ‘파라오의 저주’가 가장 유명하다. 실제로 당시 발굴 관련자 중 22명이 사망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발굴 당시보다 한참 늦게, 그 시절 평균 사망 연령보다 고령으로 사망했기에 ‘파라오의 저주’로 죽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파라오의 저주’ ‘미라의 저주’를 즐겨 말한다. 이는 사실 관계를 떠나 바람직한 현상이다. 약탈을 일삼은 제국주의 침략자를 향한 경고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서구 제국주의 국가에서 파견한 탐험가와 고고학자들은 군대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각국의 유물을 약탈해 본국으로 옮겼다. 이때 미라의 저주나 다이아몬드의 저주 등 유물이나 보물에 얽힌 괴담이 그들의 박물관으로 함께 옮겨져 근대의 새로운 전설이 되었다. ‘미라의 저주’를 이야기할 때마다 도굴꾼이나 침략자의 후손들은 선조들이 과거에 저지른 범죄를 떠올리며 뒤늦게나마 죄책감을 갖고 반성하게 되었다. 반대로 수탈당한 쪽의 입장에서는 괴담의 형식으로나마 침략자에게 저항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왜 어린이들은 귀신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밤에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갈 정도로 무서워하면서도 아침이 되면 또 무서운 이야기를 찾아보는 이유가 뭘까? 세상에 많이 있는 유령과 귀신 이야기, 괴담은 단순히 무섭지만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무서운 이야기는 그 이면에 강자들에게 희생당하고 저항하는 약자들의 입장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억울하게 죽은 약자들이 유령이 되어 출몰하거나 귀신이 되어 복수하는 이야기는 이야기를 듣는 현실의 약자들에게 카타르시스와 대리만족을 제공한다. 그래서 기성세대에 반발하기 시작하는 나이인 여러분, 바로 소년중앙 독자 연령대의 어린이·청소년들은 무서워하면서도 귀신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글=박신영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