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플러스] 입력 2015-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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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구에게든 미안해지면 기자 못해요.”
영화 ‘소수의견’에서 사건기자(김옥빈)는 변호사(윤계상)에게 이렇게 말한다.
“더 미안한 쪽을 버려요. 미안하면 못 만나요.”
TV 드라마 ‘프로듀사’에서 두 남자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성 PD에게 ‘연애의 고수’는 이렇게 충고한다.
미안함은 인간의 미덕일진대 어째서 “미안해지면 기자를 못 하고” “미안하면 못 만나는” 것일까.
2. 미안함은 소중한 감정이다. 타인이 자신에게 걸고 있던 기대를 저버리거나 충족시켜주지 못할 때 이 이름의 감정과 마주치게 된다. 이 감정이 없다면 세상은 파렴치범들로 가득 찰 것이다. 반면 역기능도 없지 않다. 개인적 인간관계에 따른 미안함 때문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뒤로 물러서는 경우다.
하지만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직업인)의 차원에서 보면 결코 바른 자세가 아니다. 검사가 개인적 인간관계 때문에 해야 할 수사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다. 판사가 해야 할 판결을 뒤로 미루거나 좌클릭 조정, 우클릭 조정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오판이다. 그러니까, 미안함을 무릅쓰고서라도 해야 하는 일은 하고, 써야 할 글은 쓰는 게 옳다.
3. 『절망의 재판소』(사과나무 펴냄)라는 책이 있다. 재판관(판사) 출신인 일본 로스쿨 교수가 일본 재판소(법원) 내부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내용이다. 그는 일본 재판관들을 ‘정신적 수용소 군도’의 수감자들이라고 지적한다. 국민의 권리를 지켜주려는 의지가 거세된 재판관들부터 추행과 괴롭힘을 일삼는 재판관의 모습까지 가감 없이 폭로한다. 과연 이런 책이 한국에서 나올 수 있을까. 이런 책을 쓰겠다고 나서는 판사 출신 법조인이 있을까.
만약 한국 사회에서 판사 출신 변호사나 교수가 자신의 경험담을 담은 책을 가령 『절망의 법원』이란 제목으로 펴낸다면, 그는 선후배·동료들과의 인연까지 포기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법조계의 ‘전관예우 산업’이 성업 중인 이유도 "언제 어디서 다시 볼지 모르는데, 미안해할 일은 없도록 합시다"는 상호 묵계에 있지 않을까. ‘신경숙 표절’ 논란도 다르지 않다. 이른바 ‘주례사 비평’의 밑바닥엔 문화권력의 문제도 있겠지만 “서로 아는 사람들끼리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내연(內緣)의 문화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4. 미안함이란 결국 자기보호 본능인지 모른다. 수천 년, 수만 년의 진화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미안한 ‘짓’을 하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일탈 행동을 하다간 금세 ‘배신자’ 낙인이 찍히고 먹이사슬에서 배제되고 말 것이라는 인과율이 미안함이란 감정으로 굳어진 것 아닐까. 그 점에서 자기보호 본능에 맞서 싸우며 소속 집단의 울타리를 넘어선 자는 높게 평가받아 마땅하다.
노무현. 그의 정치는 배신으로 점철됐다. 3당 합당에 반대하며 김영삼과의 의리를 배신했고, 지역감정을 허물기 위해 부산·경남을 배신했다. 대북송금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김대중 정부를 배신했고, 한미 FTA로 지지층을 배신했다. 나아가 사법 개혁과 검찰 개혁으로 법조계를 배신했다. 노무현의 정치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많지만 배신의 진정성만큼은 인정하고 싶다.
5. 새로운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자신을 오롯이 그 앞에 세우고, 원점에서부터 고민을 다시 시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제의 나, 어제의 우리를 버릴 수 있다는 결기로 당면 과제를 직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인의 배신은 배신 그 자체를 문제 삼을 게 아니라 무엇을 위한 배신인지, 무엇을 향한 배신인지를 따져야 한다.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야 한다”고 말하자 여당 원내대표가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두 사람이 전화기로 주고받아야 할 말을 왜 TV 카메라 앞에서 마이크 잡고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직도 대통령의 감정(배신감), 원내대표의 감정(미안함)이 국정의 최대 이슈가 되는 시대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미안함과 배신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개인적 미안함과 공적인 미안함, 개인적 배신과 공적인 배신은 구분되어야 한다. 미안함과 배신의 개념이 바로 서지 않는 한 내부 비판이나 자체 개혁의 기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정치권이든, 법조계든, 문단이든, 기업이든.
필자 소개
- 권석천 중앙일보 사회2부장
- 권석천의 숏컷 Short Cut http://blog.joins.com/kwonsukchun
- 권석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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