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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경의 잊혀진 유라시아 이야기(7):사슴이야기② 사슴을 추적해 7일째… 맨손으로 잡은 한국 사냥꾼들

바람아님 2015. 8. 28. 07:55

(출처-조선일보 2015.06.10 )


러시아 작가이자 사냥꾼이었던 얀코프스키(1911~2010)는 볼셰비키 혁명을 피해 아버지를 따라 1920년대에 함경도에 
정착했다. 그는 백두산을 비롯하여 한반도에서 조선인이 사슴사냥 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얀코프스키는 붉은 갈색에 
하얀 점들이 옆구리에 박힌 꽃사슴이 얼마나 우아하고 기품이 있는 지, 그 자태에 탄복했다.

유라시아에 ‘하얀 사슴’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바로 ‘꽃사슴’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꽃사슴 대신 “터럭 사슴”이란 말을 썼다. 
조선인들의 사슴 잡는 솜씨는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다. 
사냥에 관한 어느 연구서를 보아도 맨손으로 사슴을 잡았다는 기록은 없었다. 
사냥이야기로 유명한 쿠퍼(F. Cooper)의 소설을 뒤져도 그러한 예를 찾아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얀코프스키가 호랑이와 곰 야생 사슴등을 잡은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 /조선일보DB얀코프스키가 호랑이와 곰 야생 사슴등을 잡은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 
/조선일보DB

조선인들은 유럽인들이 도저히 생각조차 못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가반도”라 불렸던 조선의 사슴잡이들은 자연과 가까우면서 관찰력이 
뛰어났다. 봄이 되어 새싹이 돋아날 무렵 새싹 맛을 본 사슴은 나뭇가지나 
마른풀 같은 지겨운 겨울 먹잇감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때는 사슴이 극도로 쇠약해지면서 
평소 가지고 있던 힘과 끈기를 잃어버리는 시기였다.

눈이 녹는 사월이 되면 땅이 젖어 있기는 했어도 나뭇잎들이 두툼이 
쌓여 있기 때문에 사슴의 흔적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숙련된 사슴잡이들은 가벼운 막대기로 낙엽과 마른풀을 뒤적이며 
새벽부터 밤까지 아무도 볼 수 없는 사슴발자국을 찾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들이 사슴의 발자국을 찾아내는 날에는 사슴이 어디로 가든 그 발자국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돌무더기 속이든, 늪이든, 냇가이든 간에 사슴이 
지나간 흔적은 어김없이 찾아냈다.

진짜 사슴잡이는 자기가 쫓는 사슴의 발굽까지 다른 사슴들의 것과 
구별해낼 줄 알았다. 사슴에게는 숲 속의 악마 같은 존재였다. 
쫓기는 사슴은 다른 사슴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 섞이기도 했다. 
그래도 사슴잡이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자기가 쫓던 사슴의 발자국을 식별해냈다.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추격은 계속되었다. 사슴이 배고파 쓰러질 때만 노린 것이다. 
자신이 끊임없이 쫓기고 있다는 것을 느낀 사슴은 극도로 예민해져서 완전히 식욕을 잃어버린다. 
물만 자주 마실 뿐이었다.

'터럭 사슴'으로도 불린 꽃사슴.'터럭 사슴'으로도 불린 꽃사슴.

4월의 밤은 점점 짧아져만 가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허기에 기력을 잃기 시작한다. 
처음 이틀 동안 사슴을 보지 못하던 사슴잡이는 
셋째 날부터 사슴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슴은 재빨리 시야에서 사라진다. 넷째 날부터 
사슴이 눈에 들어오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고, 사슴은 자주 누워 있다가 사람이 
다가오면 펄쩍 뛰어 달아나곤 한다.

이때다 싶은 사냥꾼은 점점 가까이 다가가며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그러다 사슴이 완전히 기진맥진한 순간 올가미를 던지는 것이다. 
수컷에게는 뿔에다, 암컷은 목에다 올가미를 씌운다. 그러나 즉시 올가미를 끌어당겨 현장에서 포획하는 것이 아니다. 
그 상태로 하룻밤을 내버려 둔다. 올가미를 쓴 사슴이 심하게 저항을 하면 심장발작으로 죽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슴이 죽어버리면 6일 동안 추격해 온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7일째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허기에 쓰러져 있는 사슴을 맨손으로 생포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노련한 사슴잡이는 사슴의 발자국만 봐도 뿔의 길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뿔이 길고 무거울수록 앞발굽을 디디는 모양새가 전혀 달라지기 시작한다고 했다. 
이러한 방법은 바위가 많고 험준한 조선의 금강산 지역에서 생겨났다.

특히 금강산은 비싸고 귀한 꽃사슴을 전통적인 방법으로 포획하는 사슴사냥 지의 요람이었다. 
조선인들은 꽃사슴을 산 채로 잡는 법을 알고 있었지만, 사슴들을 길들여 번식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새끼를 밴 암컷만큼은 정성스럽게 먹여 키웠다. 다만 어미 뱃속에서 사슴 새끼가 완전히 자라날 때까지만이었다. 
그러나 새끼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에 어미는 죽였다. 
티베트 민간의학에서 매우 귀중한 약제로 간주하는 사슴의 태아 “녹태(鹿胎)”를 얻기 위해서였다.

뱃속에서 꺼낸 녹태는 살이 문드러질 때까지 곰탕을 만들어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팔았다. 
어미 사슴은 그냥 고기로 먹고 벨벳처럼 부드러운 가죽은 옷이나 장갑을 만들었다. 
수사슴의 경우는 첫 녹용이 생길 때까지만 키우고 죽여 버렸다. 그렇게 해서 이미 1920년대에 강원도 금강산 일대에서 
한국의 꽃사슴들은 거의 멸종되었다. 그러자 대부분의 사슴잡이들은 백두산 쪽으로 이동해갔다. 
그래서 백두산 지역에서는 노련한 사슴 사냥꾼을 북한식 사투리로 강원도를 일컫는 “가반도”라고 불렀다. 
이것이 한국의 꽃사슴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