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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권“각하, 살려주십시오”정인숙 사건 터지자 청와대로 달려갔다“총리 스캔들 수사는 국격의 문제” 박정희, 최대현에게 ‘보안’을 지시했다

바람아님 2015. 9. 20. 00:19

[중앙일보] 입력 2015.07.24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61> 정치인 정일권의 생존법

1974년 10월 서울 태평로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 의회)의 정일권 국회의장 방에 들른 김종필 국무총리(왼쪽)가 정 의장에게 담배를 권하고 있다. 김 총리는 이날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국회에 나왔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중앙포토]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집권 기간 중 고위직으로 장수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정일권(1917~94년)씨일 것이다. 5·16혁명 때 주미대사였던 정씨는 외무부 장관(63~64년, 66~67년 겸직)→국무총리(64~70년)→공화당 의장서리(72년)→국회의장(73~79년) 등 대통령을 제외한 최고위직을 가장 오랫동안 누렸던 인물이다. 박 대통령은 그의 어떤 점을 높이 산 것일까. 박 대통령은 그때그때 당신이 필요한 부분을 충족해 주는 사람들을 측근으로 중용했다.

 김형욱이 저돌적 공격성을 보여줬다면 이후락은 일을 꾸미는 재기가 뛰어났고 김성곤은 돈과 조직을 모으는 힘이 있었다. 정일권은 이들과 비교해 딱히 이렇다 할 장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관운(官運)이 특별한 건 분명했다. 무슨 일을 시키더라도 무난하게 처리하고 요령도 좋았다. 속을 드러내지 않고 겉으로는 기가 막히게 점잖고 온화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러다 보니 만나는 사람들한테 인상 좋은 사람으로 비춰졌다. 자리에 대한 집념이 강했지만 대통령 친위부대들의 경계 대상이 될 만큼 욕심을 부리진 않았다. 정일권은 ‘대통령 자리를 넘겨다보는 사람’은 아니었다. 상대방한테 권력욕이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김형욱·이후락이나 김성곤의 공화당 4인방은 그를 위험시한다거나 견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70년 3월 살해된 요정 선운각 출신의 호스티스 정인숙. 사망 당시 세 살배기 아들이 있었다.

 정일권의 화려한 이력서에 빈 공간이 있다. 63년 4월 주미대사를 그만두고 12월 외무부 장관이 될 때까지 8개월간이다. 그해 여름이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적을 두고 공부하던 정씨가 파리에 머물던 나를 찾아왔다. 나는 공화당 창당과 민정 이양 문제를 둘러싸고 혁명주체의 내부 갈등이 폭발 지경에 이르러 이른바 ‘자의 반 타의 반’의 1차 외유(63년 2월 25일~10월 23일) 중에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래, 앞으로 무엇을 하시려느냐”고 물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 고국에서 일 좀 하게 박정희 의장한테 말씀 좀 드려달라. 해외에 있는 것도 이젠 질렸다”고 사정을 했다. 아직 혁명정부 시절이어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내 건의를 잘 받아줄 때였다.

정 의장의 경력을 고려해 내가 “외무부 장관을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아이고, 장관 아니라도 뭐든지 시켜만 주면 감지덕지지요”라고 답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박 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런던의 정일권 장군이 저한테 와서 뭐든지 할 테니까 일 좀 시켜달라고 합니다.” “그래? 뭐해 줄까?” “외무장관을 시키면 어떻겠습니까?” “어 그래. 내가 생각해 볼게.” 박 의장은 하루 이틀 있다가 정씨를 들여보내라고 연락을 줬다.

1968년 2월 17일 중앙부처, 시·도 연두순시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왼 쪽)이 정일권 국무총리와 함께 서울역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중앙포토]

 이렇게 해서 정일권씨는 런던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그해 윤보선 후보와 대선 경쟁에서 승리한 박정희 대통령은 12월 제3공화국 초대 내각의 외무부 장관으로 정일권씨를 임명했다. 이듬해 5월엔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극심해 민심 수습 개각이 필요했다. 그때 나는 민주공화당 당의장으로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과 개각 협의를 했는데 정일권 외무장관을 국무총리로 추천했다. 정씨는 자기가 총리로 내정되면서 경제부총리로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도 함께 입각하면 좋겠다는 뜻을 밝혀 이것도 박 대통령과 협의에서 관철됐다.

 정일권씨가 자리를 부탁하기 위해 런던에서 파리로 굳이 나를 찾아왔던 까닭은 61년 10월에 있었던 나와 로버트 케네디의 만남을 직접 옆에서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내가 중앙정보부장 자격으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을 만날 때 정일권 주미대사가 수행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나를 시험하기 위해 짐짓 책상 서랍 위에 두 발을 올려놓고 딴청을 피웠는데 나도 질세라 소파에 일자(一字)로 주욱 누워버렸다. 정 대사는 당시 나의 대담한 언행에 자극을 받아 나를 만나면 무슨 수가 생기지 않을까 하고 파리로 찾아왔던 것이다.

 정일권씨는 인생의 위기가 닥칠 만한 지점에서 묘하게 빠져나가 자리까지 얻어 가는 탁월한 능력을 보이곤 했다. 70년 3월 17일 밤 11시 서울 절두산 앞 강변도로에 서 있던 코티나 차량에서 총성이 울리더니 25세 여인이 숨진 채 발견됐다. 여인은 고급 요정 선운각(仙雲閣) 출신의 호스티스 정인숙. 정인숙은 운전기사 역할을 하던 오빠 정종욱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발표됐다. 오빠가 동생을 죽였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건 수사를 경찰이나 검찰 형사부가 아니라 간첩·정치 사건을 다루는 서울지검 공안부(부장검사 최대현)에서 담당한 게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시중엔 정인숙의 세 살배기 아들 성일이가 최고위 권력층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정인숙이 미국과 일본을 드나들며 사용한 회수여권(지금의 복수여권)을 국무총리실 비서관이 주선했고, 그 신원 조회는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이 직접 담당할 정도로 특별대우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급기야 그해 5월 국회 본회의에선 신민당의 유진산 당수, 조윤형·김상현 의원이 정일권 총리를 앞에 두고 “지금 세상에선 성일이의 아버지가 정 총리라고 한다” “정 여인에 관계된 사람이 26명이 되고 박정희 대통령도 그중 한 명이라는 얘기가 돌아다닌다”고 불을 질렀다. 정인숙 사건은 그해 정치권을 뒤흔든 대형 스캔들이었다.

 박 대통령 얘기가 떠돌았던 건 전적으로 정 총리와 정 여인의 처신 때문이었다. 정인숙이 죽기 수개월 전부터 서울 정가와 워싱턴·도쿄의 한국 대사관 안팎에선 ‘정 여인의 뒤를 누가 봐주고 있느냐’를 놓고 쑥덕공론이 일었다. 정 총리는 이 문제가 나올 때마다 “난 괜히 억울하게 오해받고 있다. 다른 분이 관계 있는지 모른다”며 넌지시 박 대통령을 암시하곤 했다. 정 여인의 떵떵거리는 위세 역시 아이의 아버지가 대통령이 아니냐는 의심을 사게 만들었다.

1951년 6월 12일 강원도 속초의 국군 1군단 사령부를 방문한 정일권 3군총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중장·오른쪽)과 백선엽 1군단장. [중앙포토]

 정인숙 사건이 난 뒤 청와대에 올라갔더니 박 대통령은 “그렇지 않아도 정일권이 다녀갔다”고 했다. 정 총리는 자초지종 죽은 여자와의 관계를 실토하고 “각하, 살려주십시오”라고 호소하더라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일국의 총리가 여자 스캔들 때문에 수사를 받으면 나라가 얼마나 상처를 받겠나. 국격(國格)이 걸린 문제야. 그래서 서울지검 최대현 공안부장한테 보안 사건으로 취급하라고 지시했어”라고 말해줬다. 그 사건은 꽁지가 부러진 잠자리처럼 흐지부지 처리되고 말았다. 박 대통령은 내게 느닷없이 “정인숙을 정 총리한테 소개해준 사람이 임자라며?”라고 물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내게 대통령은 “정일권이가 그러던데?”라고 덧붙였다.

 나는 청와대에서 나와 정 총리를 찾아갔다. “정인숙을 나한테 소개받았다고 대통령께 얘기했다던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졌다. 그는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4년 전 일본 의원들이 잔뜩 왔을 때 김 당의장이 선운각에서 파티를 열어줬다. 그때 정부 측 인사로 초청받아 갔던 내 옆에 앉은 파트너가 정인숙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밥집에서 우연히 자기 옆자리에 앉게 된 여자를 밥값을 낸 사람이 소개했다고 꾸며댔으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정 총리는 “박 대통령이 갑자기 물어봐 정신이 막 돌 정도로 급해서 김종필 당의장이 소개했다는 말이 튀어나왔다”며 용서를 구했다. 66년 9월 그때 민주공화당 의장이었던 나는 서울에서 아시아국회의원연맹(APU) 총회를 주최해 일본 의원단 20명과 정 총리를 비롯한 한국 측 인사들을 초청해 만찬을 베풀었다. 정 총리는 그때 정인숙을 만났던 것이다. 박 대통령을 다시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해 나에 대한 오해는 풀었다.



 대통령은 이 사건이 있고 9개월 뒤 내각 총사표를 받는 형식으로 정 총리를 교체했다. 세월을 흘려보내고 모양과 명분을 갖춰 그를 경질한 것이니 이는 국가의 품격을 고려한 박 대통령의 인사 방식이었다. 박 대통령이 정일권 총리를 진작 물러나게 했으면 정인숙과 관련한 시중의 쓸데없는 의심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소문으로 인사를 하지 않았다. 내가 박 대통령을 잘 알지만 대통령은 정인숙과 일면식도 없는, 그녀를 전혀 모르는 관계였다.

 정 총리는 이듬해인 71년 총선에서 전국구 의원을, 73년 유신국회에서 지역구(속초-인제-고성-양양) 의원으로 선출돼 6년간 국회의장을 지냈다. 박 대통령은 자신과 동갑이자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의 동창(정씨가 각각 5년, 2년 선배)인 정일권을 끝까지 챙겨준 셈이다. 그런 은혜를 입은 정씨였기에 박 대통령이 죽어라 하면 겉으로 죽는 시늉까지 하는 충신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정인숙 사건 그 후=정인숙 사건의 의문점은 살해범인 오빠 정종욱의 배후가 누구인가, 정인숙의 아들 성일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재판에서 단독 범행으로 확정돼 무기징역형을 받은 정종욱은 1989년 가석방됐다. 그는 언론에서 “동생과 관계했던 고위층이 뒤를 봐준다고 했다. 나는 쏘지 않았다. 집 앞에 있던 괴한들이 동생을 살해했다”고 밝혔다. 청소년 시절 도미한 정성일은 23세인 91년 귀국해 서울가정법원에 정일권 전 총리를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냈으나 곧 취하했다. 이때 정 전 총리가 상당액의 합의금을 취하 조건으로 건네줬다는 소문이 돌았다. 성일씨는 93년에 다시 친자확인소송을 제기했지만 94년 정 전 총리가 사망하는 바람에 중단됐다. 성일씨는 당시 『저는 당신의 아들이었습니다』라는 책을 냈다. 결국 성일씨의 아버지는 확인된 셈이지만 범행 배후는 여전히 미스터리에 싸여 있다.


● 인물 소사전 최대현(1926~84)=정인숙 피살사건(1970년 3월)의 수사를 지휘한 서울지검 공안부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시절 인혁당 사건과 위장간첩 이수근 사건 등을 처리해 당시 대표적인 공안검사로 통했다. 이후 서울고검 검사를 거쳐 71년 12월 청와대 사정담당비서관으로 임명됐다. 74년 관세청장, 78년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공직을 떠난 뒤엔 경희대 행정대학원장으로 일했다. 승마를 하던 중 낙마사고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