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2월 26일 민주공화당 남산 당사에서 열린 창당 16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김종필 총재고문, 최규하 국무총리, 윤치영 전 당의장서리, 백두진 전 총재고문, 정일권 전 당의장서리. 박정희 시대의 국무총리 5인 중 초대 최두선 총리를 제외한 4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총리 취임은정일권(1964년 5월), 백두진(70년 12월), 김종필(71년 6월), 최규하(75년 12월) 순이다. [중앙포토] 1975년 12월 나는 건강상의 이유로 국무총리직을 사퇴했다. 4년6개월 전 총리에 취임한 뒤 쉴 새 없이 달려오다 보니 육체적으로 한계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평양방문과 유신체제의 출범, 평화통일외교정책 선언, 김대중씨 납치사건,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 등 수많은 일을 헤쳐 왔다. 정치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특유의 ‘디바이드 앤드 룰(divide and rule:분할 통치)’ 통치술로 나를 힘들게 했다. 대통령의 친위부대들로 하여금 나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하게 했다. 내 몸은 진작부터 이상신호를 보여왔다. 73년 2월 23일 주월(駐越) 백마부대 개선 환영대회가 열린 경기도 수원비행장에서의 발병(發病)이 그 조짐이었다. 영하 12도의 매서운 찬바람이 부는 활주로상의 연단에서 대통령을 대신해 환영사를 하던 중 오른쪽 뺨에 경련이 일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꽝’하고 머리 속에서 망치를 때리는 것 같은 충격이 왔다.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9대 총선(2월 27일)에 대전에서 출마한 김용태(1926~2005) 의원이 찾아왔다. “대전 상황이 좋지 않은데 한 번 와서 지원유세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총선이 코앞에 다가온 터라 거절할 수 없었다. 곧바로 대전으로 내려가 그날 저녁 지원유세를 했다.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돌아온 시각이 새벽 3시였다. 열이 39도까지 올랐다. 관저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져 드러눕고 말았다. 며칠 뒤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병문안차 오셨다. 내가 열이 40도 가까이 올라가고 다 죽어간다는 얘기를 듣고 총선 투표를 한 후 찾아오신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을 일어나지 못했다. 그 뒤에 열이 좀 내리긴 했는데, 이번엔 오른쪽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2008년 말 뇌졸중이 발병돼 오른쪽 신체가 불편하게 됐는데, 73년부터 이상 기운이 나타났던 셈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돌아다니며 일을 했다. 73년 5월엔 서유럽 순방에 나섰다.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 내 주치의인 서석조(1921~99) 박사의 안내로 중국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주석을 치료한 프랑스 뇌신경계 권위자를 소개받았다. 호텔 방으로 그 의사를 불렀다. 그는 나를 발가벗겨놓고 두 시간 동안 검진을 했다. 그는 “병을 고치려면 공직을 떠나 장기요양을 해야 한다”며 “특효약은 없고 총리를 그만두는 게 바로 약이다”고 처방을 했다. 귀국 후 박 대통령에게 ‘총리를 그만두게 해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혹시나 박 대통령이 ‘꾀를 부리는구나’ 하고 오해할까봐였다. 그 무렵 박 대통령은 과거의 박정희 장군이 아니었다. 5·16혁명 때만 해도 박 대통령은 나를 파트너처럼 생각했지만 권력의 속성을 알아가면서 스스로 절대 권력자가 되어갔다. 그런 박 대통령에게 나는 ‘옆에 있으면 신경 쓰이고 멀리 있으면 아쉬운 존재’였다. 나는 나대로 대통령의 그런 느낌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심려를 끼치지 않도록 해야 했으니 마음고생이 여간 심한 게 아니었다. 쌓이는 격무와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겹쳐 병은 깊어갔다.1975년 12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신임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74년 12월 27일 청와대에 올라가 유신헌법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건의했다. 그 말끝에 “이제 저 좀 놓아주십시오. 몸이 도저히 말을 듣지 않습니다”라고 호소하듯 말했다. 그때는 지병인 허리 디스크까지 도져 거동 자체가 불편한 지경이었다. 박 대통령은 대뜸 “말은 들었어. 별것 아니라고 그러더군. 왜, 하기 싫어서 그런 거지?”라고 눙쳤다. 나는 “지금까지 외부에 제 병세가 알려질까봐 그냥 무리하고 있는 것이지 사실은 결딴이 난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대통령 주치의 지홍창 박사와 내 주치의 서석조 박사, 가정의인 고극훈 박사, 이렇게 3명이 대통령에게 내 증상과 병명을 상세히 보고하고서야 박 대통령은 수긍을 하셨다. 그렇게 해서 총리직을 겨우 물러났다. 박 대통령은 나에게 총리 후임으로 누가 좋을지 물었다. “각하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자 “최규하(1919~2006·10대 대통령) 특보가 어떠냐”고 다시 물었다. 대통령이 다 정해 놓고 물어보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최규하 후임 총리는 해방 후 군정 관리였다가 외교관이 됐다. 5·16혁명 직후 중앙정보부장이던 내가 민주공화당을 사전 조직할 때 행정부에서 유능한 공무원으로 차출한 셋 가운데 한 명이다(나머지 두 사람은 훗날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 경제부총리를 지낸 김학렬). 최 총리는 67년 외무부 장관을 지냈고 72년엔 남북조절위원으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다. 과묵하고 박 대통령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다. 국무총리직을 그만뒀다고 일이 손에서 떠난 것은 아니었다. 병세가 어느 정도 나아진 76년 5월 30일 한일의원연맹 창립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청와대에 올라갔다. 박 대통령은 “이제 건강이 많이 회복된 듯 보인다”며 “임시수도 후보지를 은밀히 물색해 보라”고 지시했다. 몇 개월간 나를 멀리 두고 있다 보니 이젠 적당한 거리에서 매어두고 싶어 하는 박 대통령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즉시 윤천주(1921~2001) 서울대 총장에게 부탁해 최상철(75·환경대학원), 주종원(1932~2014·건축학과) 교수에게 비밀리에 일을 맡겼다. 수도 이전계획이 소문나면 부동산 투기꾼들이 몰려들 것이기에 철저한 비밀이 요구됐다. 두 교수는 서울 남산 타워호텔에 방을 얻어 3주간 동안 계획을 세워 나에게 1차 보고한 뒤 현장 답사를 나갔다.박정희 정부가 충남 공주군 장기면에 임시행정수도를 건설하기 위해 1977년 세운 ‘장기행정수도 종합계획도’. 지금의 세종시와는 달리 중앙청뿐 아니라 청와대와 대법원, 국회까지 모두 이전한다는 구상이 도표에 나타나 있다. 아래는 산 아래 논이 펼쳐진 시골 마을이었던 장기면의 당시 모습. [중앙포토] 6월 하순 어느 날 청구동 집으로 뜬금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공주 경찰서장이라고 했다. “행색이 이상한 사람 두 명이 공주 장기면 일대를 하루 종일 돌아다니기에 간첩으로 의심돼 잡아들였습니다. 아무리 신문해도 대답을 안 하고 그냥 김종필 전 총리에게 물어보라는 말만 하기에 이렇게 전화드렸습니다.” 최상철·주종원 교수였다. 먹물깨나 먹은 듯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운동화와 각반(脚絆) 차림으로 시골마을 논밭 사이를 돌아다니니 오해를 살 만도 했다. 나는 서장에게 “뭐 하는지 묻지도 말고 당장 풀어줘라. 그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일반 사람들이 알게 되면 서장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엄하게 입단속을 했다. 나는 두 교수에게 임시수도 입지 물색을 위한 몇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우선 위치는 대전 북방. 수도권에서 가까우면서도 북한이 휴전선에서 최신 미사일 프로그(FROG·사정거리 70㎞)를 쐈을 때 사정권을 조금 벗어난 지역을 고르라고 했다. 북한이 미사일로 기습을 하면 서울은 그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불바다가 된다. 700만 인구가 밀집한 곳에 몇 발만 쏘면 기름이 가득 찬 자동차들에 연쇄화재가 나서 온 시내가 야단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조건으로 금강에서 가능한 한 가까운 곳을 찾으라고 했다. 도시는 강을 끼는 것이 이상적이다. 임시수도 규모는 최종적으로 인구 50만 명 정도가 안주할 수 있는 곳으로 잡게 했다. 그렇게 해서 선정한 곳이 지금의 충남 세종시 부근이다. 다만 지금 정부세종청사는 76년에 골랐던 장소보다 금강에서는 좀 멀고 경부선 철도와도 많이 떨어져 있다. 물색한 임시수도 후보지를 한 달 만에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청와대와 국회도 모두 옮겨간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임시수도 이전계획의 발상은 안보상 문제와 수도의 인구과밀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의 일환이었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당연히 수도는 서울로 돌아오기로 계획돼 있었다. 대통령은 이 구상을 77년 2월 10일 서울시를 연두 순시한 자리에서 처음으로 공개했다. 박 대통령은 “이제 자주국방 태세가 확립되고 힘의 우위를 과시할 수 있게 됐기 때문에 수도 이전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그러나 유사시 서울 사수(死守) 방침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그 후 박 대통령의 생각이 좀 달라졌다. 78년 1월 연두기자회견에서 “임시수도 이전은 별 진전이 없다”고 밝혔다. 수도 이전에 드는 돈이 문제였다. 교수들이 추정한 예상 비용은 5조원이었다. 막상 착공을 하면 원래 비용의 3~4배가 들어가는 법이다. 그런 돈을 임시수도 이전에 사용할 만큼 나라에 여유가 없었다는 판단을 박 대통령이 하게 된 것이다. 한창 중화학공업의 기초를 닦느라고 돈이 필요한 때였다. 박 대통령은 “그 돈이 있으면 중화학공업에 투자하자”고 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1977년 5조원의 가치=임시행정수도 이전에 필요했던 당시 예산 5조원의 현재 가치를 계산하면 약 39조원에 해당한다. 2015년 6월의 소비자물가지수가 77년과 비교해 7.9배로 뛰었기 때문이다. 현재 세종시의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사업에 투입되고 있는 총사업비는 22조5000억원(2030년 종료 예정, 정부 8조5000억원, 한국토지주택공사 14조원)이다. ◆대통령 주치의=대통령의 건강 진료에 관해 최종 결정권을 행사하는 차관급 인사. 무보수 명예직으로 대통령의 휴가, 해외 순방, 지방 방문 일정에 동행하는 측근이다. 국가원수의 질병 정보는 은밀성이 요구되기에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의사가 주로 임명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초대 주치의는 한국에 종두법(천연두 예방법)을 보급한 지석영 선생의 종손 지홍창(내과·개업의) 박사다. 그는 박정희 장교 시절 군의관이었다. 박 대통령의 2대 주치의는 서울대 의대 민헌기(내분비 내과) 교수로 9년간 재임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첫 주치의 가톨릭대 민병석 교수는 미얀마 아웅산 테러로 목숨을 잃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주치의는 연세대 의대 허갑범(내분비 내과) 교수로 김 대통령이 야당 시절 단식 때 인연을 맺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방 주치의 제도를 도입했다.● 소사전 프로그 미사일=1965년 소련이 제작한 탄도미사일. 북한은 1969~70년 프로그(FROG)-3, 프로그-5, 프로그-7을 수입했으며 최대 사정거리는 70㎞로 서울 공격이 가능하다. 550㎏의 고폭탄·핵폭탄·화학탄 탄두를 탑재할 수 있다. 휴전선 부근에서 발사된 프로그 미사일의 서울까지 도달시간은 2분 이내다. 박정희 대통령의 임시행정수도 이전 발상의 한 요인이 됐다. 박 대통령은 프로그 미사일에 대항할 유도미사일 개발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미제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을 개량한 한국 최초의 지대지미사일 ‘백곰’이 78년 9월 26일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백곰의 사거리는 180㎞, 탄두 중량은 500㎏.